2시간 멈춰 선 美통근열차… 항의하는 승객은 없었다

  • 동아일보
  • 입력 2015년 5월 15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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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파원의 취재노트/부형권]

부형권 특파원
부형권 특파원
“으아아아!”

13일 오후 11시 14분(현지 시간) 미국 뉴욕 펜스테이션을 출발해 롱아일랜드 ‘포트 워싱턴’ 종착역을 향해 달리던 롱아일랜드레일로드(LIRR) 통근 기차 안. 정체불명의 외마디 비명 소리와 함께 기차가 멈춰 섰다. 베이사이드 역을 100m 정도 앞둔 지점에서였다.

기관사석과 붙어 있던 칸에 타고 있던 기자를 포함해 30여 명의 승객은 순간 모두 어리둥절한 상태. 잠시 뒤 비명을 지른 사람은 갑자기 선로에 뛰어든 사람을 발견하고 급정거를 하려 했던 기관사로 확인됐다.

기자도 ‘철로 위를 무심코 걷다가 사망자 통계에 포함되지 말라’는 경고 포스터를 매일 보며 출퇴근하고 있지만 실제 그런 사고를 겪기는 처음이었다.

기차가 굉음을 내며 정차한 직후 안내방송이 흘러나왔다.

“예상치 못한 사고로 기차를 멈췄습니다. 불편을 끼쳐 죄송합니다.”

이어서 바로 300∼400명의 승객이 탄 기차 안에 전원(電源)이 끊어졌고 에어컨도 함께 꺼졌다. 실내 조명등만 켜진 어두컴컴한 상태가 되었다. 이내 ‘답답하고 덥다’는 느낌이 들었지만 승객들 모두 놀란 표정을 가라앉히고 침묵을 지키며 자리에 앉은 상태여서 뭐라고 하소연을 할 수가 없었다. 모두들 스피커에서 나올 기관사의 다음 안내를 기다리는 눈치였다.

실제로 약 5분 간격으로 “예상치 못한 불편을 끼쳐 죄송합니다”라는 안내 방송이 흘러나왔다.

조금 시간이 지나자 긴장을 다소 푼 승객들은 휴대전화로 집에 사고 소식을 알린 뒤 옆 사람과 “이 시간에 누가 철로에 뛰어든 걸까” “언제쯤 집에 갈 수 있을까”라며 소곤소곤 얘기를 나누는 모습도 보였다. 오후 11시 46분. 기자 맞은편에 앉아 있던 중년의 백인 여성이 마침 곁을 지나가는 승무원에게 “휴대전화 배터리가 다 떨어져 간다. 충전하게 전원 좀 켤 수 없느냐”고 물었다. 남자 승무원은 “No(안 됩니다)”라고 짧게 대답하고 지나갔다.

몇 분 뒤 LIRR 트위터에 들어가 보았더니 ‘경찰 조사에 따른 기차 운행 지연 소식’이 올라와 있었다. 기차 밖에선 경찰들과 메트로폴리탄교통공사(MTA) 관계자들이 시신을 수습하고 사고 원인을 조사하는 작업이 이뤄지고 있었다. 기차 안에선 적막감이 느껴질 정도로 승객들 모두 그냥 조용히 앉아 있었다.

시간은 자정을 넘기고 있었다. 0시 4분(14일)쯤 “비상용 물을 나눠 드리겠다”는 안내 방송이 나오더니 승무원이 우유팩처럼 생긴 ‘물 팩’을 하나씩 나눠 주기 시작했다. 국토안보부의 승인을 받은, ‘5년간 보관’이 가능한, 그야말로 비상용 물이었다. 통근 기차 안에도 승객 수만큼의 비상용 물이 상비돼 있다는 게 신기하게 느껴졌다.

휴대전화를 충전하지 못해 계속 안절부절못하던 그 백인 여성이 물을 나눠 주는 승무원에게 “와인은 없나요?”라고 하자 열차 안에는 웃음이 번졌다. 0시 10분. 다른 경찰 1명이 열차 안을 돌면서 “모두 괜찮죠?”라고 물었다. 사고 한 시간이 지난 0시 19분에도 안내 방송이 “여러분의 인내심에 감사드린다”로 달라졌을 뿐 상황은 그대로였다.

경찰이나 승무원을 붙잡고 이것저것 따져 묻는 승객들은 없었다. 조용한 가운데 한 20대 아시아계 남자가 “허가받지 않은 사람이 선로에 뛰어들어 기차에 치였다는 내용이 트위터에 올라와 있다”고 다른 승객에게 이야기하는 소리가 들렸다. 0시 57분 그 말 많던 백인 여성이 다시 입을 열었다. “우리 기차에서 내리면 안 되나요? 내일 아침 일찍 출근해야 하거든요.”

그러자 승무원의 단호한 목소리가 들렸다. “절대 안 됩니다. 그러면 새로운 문제가 생기고 정해진 사고처리 규정에도 어긋납니다. 지금은 경찰이 모든 걸 통제하는 상황입니다.”

이윽고 기차가 멈춰 선 지 두 시간도 더 지난 오전 1시 19분이 돼서야 전원이 들어오고 기차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예상치 못한 사고로 정차한 기차 안에서 “왜 이렇게 처리가 늦냐” “급한 일이 있어 빨리 가야 하는데 당신들이 책임질 거냐”라고 따지거나 고함치는 사람이 왜 단 한 명도 없는 걸까. 많이 궁금했지만 차마 물을 수가 없었다. 그들의 표정과 태도에서 ‘그건 너무나 당연한 일’이란 걸 읽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뉴욕=부형권 특파원bookum90@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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