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세영의 따뜻한 동행]공항의 추억

  • 동아일보
  • 입력 2013년 7월 25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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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일이었다. 평소에는 “빨리 빨리”를 외치던 남편이 그날따라 늑장이었다. 빨리 출국장으로 들어가자고 몇 번이나 재촉을 해도 들은 척도 안 한다. 탑승시간 30분 전이라고 말하니까 여행가이드 책이나 한 권 사오겠다며 서점으로 가버린다. 어깃장을 놓겠다는 심보가 아니라면 이건 아니다. 에라, 모르겠다. 본인 볼일로 나가는 건데 비행기 못 타도 난 하나도 갑갑할 것 없다고 마음을 고쳐먹었다.

책 한 권 사들고 어슬렁거리며 나타난 남편. 탑승 15분 전인데 그제야 출국장으로 들어갔다. 작은 항공사라서 보나마나 탑승동은 멀리 떨어져 있을 것이고, 줄 서서 출국심사 받고 게이트까지 가려면 15분으로는 어림도 없어 보인다. 아니나 다를까, 내 예상대로 탑승동을 가려면 셔틀 트레인을 타야 했다.

셔틀 트레인에서 내리자마자 울리는 전화벨. 비행기가 출발하려고 하는데 도대체 어디 있느냐는 공항 직원의 전화였다.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올라가는 중이라고 했더니 공항 직원이 위에서 내려다보며 빨리 오라고 손짓했다. 에스컬레이터에서 내리니 맙소사! 출발 1분 전인데 탑승해야 할 게이트는 까마득히 멀었다. 빛의 속도로 뛰었다.

“난 비행기 안 타도 되고요. 저 사람이나 타고 가라고 해요. 난 더이상은 못 뛰어요.”

많은 사람이 쳐다보는 앞에서 공항 직원의 독려를 받으며 뛰다 보니 숨은 차고 화가 치밀어서 그 자리에 섰다.

“손님, 지금 비행기 안에서 수백 명이 기다리고 있어요. 빨리 뛰셔야 해요!”

남편과 비행기를 타고 싶은 마음은 눈곱만큼도 없지만 나 때문에 하이힐을 신고 같이 뛰는 이 여직원이 무슨 죄랴! 할 수 없이 젖 먹던 힘까지 다했다. 숨을 헐떡거리며 간신히 비행기에 오르니 이런 망신, 모든 승객이 나를 바라보고 있다. 나는 그들의 눈빛을 읽는다.

‘미리미리 좀 서두를 것이지. 매너 없기는 쯧쯧.’

나중에 들으니 남편은 비행기 출발시간을 12시 30분으로 잘못 알았다는 것이다. 그래서 내가 괜히 안달을 부린다고 생각하며 버티었던 모양이다.

“설사 12시 30분으로 알았어도 그렇지. 내가 그만큼 이야기하면 무조건 따라주어야 하는 거 아냐?”

그렇게 쏘아붙였지만 분이 풀리지 않았다. 남자들은 모여 앉으면 말한다. 집에서는 부인, 운전할 땐 내비게이션, 골프 칠 땐 캐디, 이렇게 세 여자 말을 잘 들어야 만사형통이라고 말이다. 여름 휴가철을 맞아 더욱 붐비는 인천공항에서 오늘도 마구 뛰는 여자가 있다면 보나마나 그건 부인 말 안 들은 남편 탓일 게다.

이 글을 쓰면서 새록새록 작년 일이 떠올라서 남편에게 다시금 묵은 화풀이를 했다. 여자들은 뒤끝이 길다. 그러니 세상의 남편들은 아내 말에 귀 좀 기울이시라!

윤세영 수필가
#공항#남편#아내#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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