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룸/염희진]‘불타는 갑판’ 위의 롯데

  • 동아일보
  • 입력 2018년 11월 1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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염희진 산업2부 기자
염희진 산업2부 기자
최근 롯데케미칼은 창사 이후 처음으로 ‘글로벌 케미스트리’란 주제의 TV 광고를 내보내고 있다. 7월 처음 방영된 동남아시아편에 이어 10월 초 방영된 TV 광고는 미국 루이지애나주에 완공을 앞둔 에탄크래커(ECC) 생산 공장을 소개했다. 전형적인 B2B(기업 간 거래) 기업인 롯데케미칼이 일반 소비자를 대상으로 기업 광고를 제작한 건 이례적이다. 롯데케미칼 측은 “잘 알려지지 않던 롯데케미칼의 위상과 규모를 대중에게 알리고자 했다”며 이유를 설명했다. 대중에게는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롯데 화학부문은 지난해 매출 20조 원을 넘기며 유통부문과 맞먹는 성과를 내고 있다.

지난주 발표한 대규모 투자계획에서도 롯데는 화학부문을 강조했다. 그룹 차원에서 5년간 투자할 총 50조 원 가운데 40%인 20조 원을 화학 및 건설부문에 투자한다고 밝혔다. 롯데제과로 출발한 롯데그룹이 식품과 유통 위주의 내수 기업에서 벗어나 화학과 이커머스를 주력으로 하는 글로벌 기업으로 거듭나겠다는 의지를 밝힌 셈이다.

이는 식품을 통해 기업을 일군 아버지 신격호 총괄회장과는 다른 길을 걷겠다는 신동빈 회장의 의지이기도 하다. 신 회장이 경영수업을 받던 곳은 당시 잘나가던 롯데쇼핑이 아니었다. 연매출 1조 원이 되지 않던 호남석유화학이었다. 그는 이후 2004년 호남석유화학 공동 대표이사가 되면서 적극적인 인수합병을 통해 화학부문의 덩치를 키워 나갔다.

동시에 신 회장은 그룹 경영권을 확보하는 과정에서 각종 변화를 시도했다. 직원 처우에 야박한 짠돌이 기업, 남성 위주의 권위적 기업으로 유명했던 롯데는 임직원 복리후생 강화를 비롯해 여성 임원 채용, 남성 육아휴직 등을 적극적으로 벌이고 있다. 한 계열사 직원은 “매년 초 사내 등산 행사에 직원들이 동원되던 일이 지난해부터 사라졌다”며 “계열사 대표들이 불합리한 조직문화를 과감하게 바꾸고 있다”고 말했다.

경영학에서는 ‘불타는 갑판’이라는 용어가 종종 쓰인다. 1988년 영국 북해 유전에서 석유시추선이 폭발했을 때 배 위에 있던 사람들은 불타는 갑판에서 타서 죽느냐, 바다에 뛰어내려 상어의 먹이가 되느냐를 선택해야 했다. 결국 바다로 뛰어든 사람들만 모두 생존했다. 이후로 불타는 갑판은 절체절명의 위기상황에서 새로운 변화와 혁신을 추구하는 기업을 상징하는 말이 됐다.

롯데의 지난 3년은 참담했다는 표현이 아깝지 않을 정도로 악재의 연속이었다. 제2롯데월드몰의 수족관 사고, 경영권 분쟁, 경영비리에 대한 검찰 수사, 신 회장 수감으로 점철됐다. 여기에 사드(THAAD) 보복이라는 외풍으로 롯데는 대부분의 중국 사업을 철수했다. 게다가 계열사들의 갑질 의혹도 꾸준히 제기되고 있다. 하지만 롯데에 이러한 위기들이 닥치지 않았더라면 재계 5위인 롯데가 지금처럼 절박하게 변하려 했을까.

아직 재판이 남아있지만 이제야 경영으로 복귀한 신 회장은 자신의 능력뿐만 아니라 변화의 모습을 제대로 보여줄 때가 왔다. 그런 의미에서 롯데엔 위기에 처한 지금이 기업 혁신을 위한 가장 훌륭한 타이밍일지 모른다.
 
염희진 산업2부 기자 salthj@donga.com
#롯데케이칼#에탄크래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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