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사이드 코리아/인요한]한국 교회 초심으로 돌아가야

  • 동아일보
  • 입력 2011년 6월 10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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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요한(존 린튼) 연세대 세브란스병원 가정의학과장
인요한(존 린튼) 연세대 세브란스병원 가정의학과장
미국 남장로교가 한국 호남지역 선교사로 파송한 나의 진외조부 유진 벨 선교사가 1895년 한국 땅을 밟았을 때는 한국인의 0.1%도 기독교를 믿지 않았다. 호남지역은 동학농민운동(1894년) 이후 서양에 대한 반감이 유독 심했다. 하지만 한국 기독교의 교세는 급속도로 확장됐다. 한국인이 워낙 종교성이 발달한 데다 시대 상황과 맞물렸기 때문이다.

한국인들은 신을 두려워한다. 조상의 묏자리를 옮기거나 잡신을 다스리기 위해 고사를 지내고, 동네 한가운데 나무에 새끼줄을 묶어 신성시하는 등 다양한 종교행위가 전해 내려온다. 어릴 적 차를 사면 돼지머리를 놓고 고사부터 지내는 것을 본 기억도 있다.

한국인들은 역사적으로 외부의 침략을 많이 받았고 내부적인 세력 다툼도 끊이지 않아 하루하루 사는 게 어려웠다. 병들어 죽을 가능성도 높았다. 삶에 대한 도전이 종교 수요로 이어졌다.

일제강점기는 기독교 교리가 뿌리 내리기 쉬운 토양이었다. 기독교 구약성서에 따르면 애굽에서 탄압받던 유대 민족은 유일신 하나님을 통해 해방됐다. 예수는 인간들로부터 온갖 핍박을 받고 죽음을 당하지만 인간을 구원한다.

일제의 핍박을 받던 조선 민족에게 이런 스토리는 희망의 상징이었다. 조선 민족도 유대 민족처럼 핍박받고 있지만 결국 해방되고 구원을 받으리라는 메시지였다. 인간을 평등하게 보는 기독교 신앙은 현실세계에서도 구원의 증거를 낳았다. 연세대 의대의 전신인 세브란스 의학교의 첫 졸업생은 백정의 아들(박서양)이었다.

기독교계가 일제에 맞선 것은 국가 차원을 넘어 구원을 향한 종교운동이기도 했다. 유진 벨 선교사의 사위이자 나의 할아버지인 윌리엄 린튼 선교사가 3·1운동 당시 남긴 일기에는 다음과 같은 표현이 나온다. “기독교인의 숫자는 2%에 불과한데 독립운동에는 30%가 가담하고 있다. 참으로 교회는 독립운동의 초소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역사적으로 이같이 한국에서 ‘빛과 소금’이었던 기독교가 최근 들어 교인이 줄고 존경을 예전만큼 받지 못하고 있다. 한국 기독교의 역사를 살피면 이해하기 힘들다.

가장 큰 원인은 급성장에 있다. 질보다 양으로 너무 빨리 성장했다. 이 과정에서 기독교를 믿고 교회를 다니는 게 ‘패션(fashion)’이 됐다. 교회가 중심이 되지 못하고 교우가 중심이 됐다. 교회에서는 열심히 자신의 죄를 회개하지만 이웃에게도 그런지 의심스럽다.

이웃을 돌아보기보다 자신만을 향한 믿음을 쌓는 좋은 예는 서울역에서 마이크를 들고 전도하는 사람들이다. 노숙인들은 술에 취해 땅바닥을 기어 다니는데 마이크를 들고 예수를 믿으라고 외친다. 이들이 노숙인들에게 어떤 실질적인 도움을 줄 수 있나. 다일공동체의 최일도 목사같이 전도 대신 밥주걱을 든 사람도 있다. 하지만 소수다. 예수가 현재의 한국 땅에 허름한 옷을 입고 며칠간 목욕하지 않은 몸으로 교회에 들어서면 환영받을 수 있을까.

한국 교회는 원칙과 사랑을 지켰던 예전 모습으로 돌아가야 한다. 내가 가장 존경하는 손양원 목사는 여수·순천사건에서 좌우 노선 대립으로 아들 두 명이 총살됐지만 총살 주도자였던 청년을 양자로 들였다. 그는 6·25전쟁 때 피란을 거부하고 한센인들을 돌보다 공산군에게 총살됐다.

그의 장례식 상주로 친아들을 죽인 양자가 서있는 사진이 남아 있다. 이 사진은 기독교인이 살아야 할 삶을 제시한다. 기독교의 핵심 경쟁력은 원수를 감싸 안는 데 있다. 기독교를 믿으면 복이 오고 돈을 많이 버는 게 아니라 원수에게 핍박을 받고 손해도 볼 수 있지만 이를 감수하는 일이다. 그것이 예수의 가르침이다. 심심치 않게 기독교를 통해 촉발되는 종교 갈등의 해법을 여기에서 찾을 수 있다.

인요한(존 린튼) 연세대 세브란스병원 가정의학과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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