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찬식 칼럼]사교육비 공포에 교육 표류시키는 정부

  • 입력 2009년 3월 26일 19시 59분


한국에서 교육정책을 발목 잡기는 아주 쉽다. 사교육비가 크게 늘어날 거라며 목청을 높이기만 하면 된다. 정부는 움찔하며 바로 뒤로 물러선다. 한때 정부가 요란하게 선전했던 영어교육 강화정책이 그랬다. 서울 국제중학교 입시는 기형적인 ‘탁구공 추첨’으로 전환했고 곧 설립되는 자율형 사립고도 같은 방식을 택했다. 대학입시는 자율화를 약속한 뒤 1년도 안 돼 정부 규제로 되돌아갔다. 모두 사교육비 우려에 정부가 후퇴한 결과다.

진퇴양난의 늪에 빠진 현장

과도한 사교육비에 따른 사회적 고통이 심해지면서 교육 전체가 꽁꽁 손발이 묶이는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 그렇다고 지금 이대로의 교육이 사교육비를 줄여주는 것도 아니다. 지난해 국내 총사교육비는 20조9000억 원으로 2007년보다 4.3% 늘어났다. 새로운 교육정책을 도입해 변화를 시도하면 그에 따른 사교육비 수요가 발생할까 두렵고, 망가질 대로 망가진 현재의 교육을 그냥 놔둘 수도 없는 진퇴양난의 늪에 빠진 것이다.

사실 사교육비 문제에는 한국 사회의 자화상이 담겨 있다. 부모로서 자녀를 잘 키우려는 본능적 동기 이외에 신분 상승과 체면, 생존과 적응 같은 각종 욕망이 가세해 사교육비를 부풀리고 있다. 사교육비를 줄이는 것에만 초점을 맞춘다면 확실한 방법이 있긴 하다. 과외를 전면 금지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렇게 되면 한국이 세계와 경쟁하는 일은 포기해야 한다. 사교육을 무조건 막기만 한다고 교육 문제가 해결되지는 않는 것이다. 복잡 미묘한 이 문제를 냉철하게 바라볼 필요가 있다.

정부가 교육 분야에서 맡은 역할은 어느 나라나 비슷하다. 공교육 수준을 높이고 교육의 질을 잘 관리하며 저소득층에게 교육 기회를 확대하는 것이다. 대학경쟁력을 높이는 일도 중요한 과제로 떠오르고 있다. 모든 정부가 양질의 교육을 창출하는 일에 집중하고 있는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정부가 공교육을 잘 만들어 놓으면 사교육은 자연스레 위축될 수밖에 없다.

하지만 한국의 역대 정부는 이런 근본적인 역할을 제쳐둔 채 사교육비에 신경을 곤두세웠다. 사교육비가 늘면 정권 지지도가 떨어지는 걸 걱정해서다. 하지만 사교육비에 매달리면 교육정책은 인기 위주로 흐르기 쉽다. 긴 안목에서 필요한 정책을 밀고나갔던 정부가 없었던 것은 우리에게 불행이었다.

교육정책에서 이명박 정부의 시작은 창대했다. 당장이라도 교육을 변혁시킬 것같이 기세등등했던 게 1년 전이었다. 그러나 그동안 아무 것도 바꿔놓은 게 없을뿐더러 사교육비 얘기만 나오면 이전 정부보다 더 안절부절못하고 있다. 논란이 되고 있는 입학사정관제만 해도 사교육비를 줄일 것이라고 생각해 대학들에 200억 원 이상의 ‘당근’을 주어가며 빨리 도입하라고 성화이더니 갑자기 태도가 달라졌다. 입학사정관 제도를 서둘러 도입하면 그에 맞는 준비를 해주는 또 다른 사교육 시장이 커진다는 사실을 뒤늦게 깨달은 것이다.

철학과 원칙 지켜야 개혁 가능하다

오락가락의 배경에는 지난 대선 때 ‘사교육비를 절반으로 줄이겠다’는 공약을 해놓은 게 크게 작용하고 있다. 정부 관리들 입에선 ‘절반 사교육비’라는 말이 자주 나온다. 아직도 공약에 집착하고 있다는 얘기다. 그러나 사교육비를 절반으로 줄인다는 목표는 애당초 달성이 불가능한 것이었다. 사교육비 지출을 지금 정도로만 막는 것도 쉽지 않은 일인데 어떻게 절반으로 낮춘다는 건지 이해할 수 없다.

이 공약에 매달리는 한 정부는 임기 내내 ‘개혁’과 ‘절반 사교육비’ 사이에서 헤맬 것이다. 두 목표는 동시에 이뤄질 수 없는 것일뿐더러 특히 ‘사교육비 줄이기’는 교육정책에서 최우선 목표가 될 수 없다. 정부는 교육의 질을 높이는 일에 충실함으로써 그 결과로 사교육비를 줄이는 효과를 얻는 데 주력해야 한다. 이 대통령은 당장의 인기보다는 교육철학과 원칙을 고수하며 ‘시작은 미약했으나 끝이 창대해지는’ 쪽을 택해야 한다. 그래야 교육개혁을 이룰 수 있다.

홍찬식 논설위원 chansik@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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