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호 칼럼]스승의 날, 러멜과 이상우

  • 입력 2008년 5월 12일 22시 24분


한림국제대학원대 이상우 총장은 해마다 미국 하와이에 간다. 은사인 하와이대 명예교수 루돌프 러멜(74·국제정치학)을 찾아뵙기 위해서다. 나이는 네 살밖에 차이가 안 나지만 선생님이 늘 걱정스럽다. 건강은 어떠신지, 연구에 불편은 없으신지 두루 살펴야 마음이 놓인다. 이러기를 벌써 35년째다. 그동안 단 한 해도 문안 인사를 거른 적이 없다.

2∼4일 호놀룰루에서는 ‘한미동맹의 미래’를 주제로 한 국제학술회의가 열렸다. 이 총장이 이사장으로 있는 신(新)아세아질서연구회와 워싱턴의 전략국제문제연구소(CSIS)가 공동 주최한 회의였다. 회의 내용은 알찼다. 참가자들은 한미동맹의 복원을 환영하면서도 자유무역협정(FTA) 연내 비준과 북핵 문제의 순조로운 해결 가능성을 높게 보지 않았다. 필자도 토론자로 참석했으나 비공개여서 논의된 내용을 상세히 소개하지 못하는 게 아쉽다.

회의 마지막 날, 이 총장은 약간 상기된 표정으로 러멜을 만나러 갔다. 한미동맹을 놓고 열띤 토론을 한 뒤여서 할 얘기가 더 많은 듯했다. “선생님은 뵐 때마다 학계의 동향이나 새로운 학설, 꼭 읽어야 할 책들에 대해 얘기해 주신다”고 그는 말했다. 놀라웠다. 무엇이 칠십이 넘은 두 학자를 이처럼 끈끈한 사제(師弟)의 정으로 묶었을까.

이상우가 전쟁과 평화 연구의 대가인 러멜을 만난 것은 1967년이다. 서울대 법대를 졸업하고 신문기자를 하던 그는 미국 국무부 장학생으로 선발돼 하와이대로 유학을 가게 된다. 러멜이 예일대에서 하와이대로 옮긴 이듬해의 일이다. 당시 하와이대 정치학과는 미 대학 과별 랭킹에서 언제나 최상위권에 들었다고 한다.

태평양 넘나든 40년 師弟의 情

이상우는 러멜의 제자가 됐고 1971년 박사학위를 받는다. 러멜은 그를 무척 아꼈던 것 같다. 미 국방부의 지원을 받아 국가차원연구(DON·Dimensionality Of Nations)라는 대형 프로젝트를 수행 중이었는데 이상우를 이 연구소의 부소장에 앉힌다. 두 사람 앞에 놓인 과제는 국가 간의 갈등(전쟁)을 예측할 수 있는 수학적 모델을 만드는 일이었다.

당시에는 국제정치학계도 행태주의의 영향으로 수학을 이용한 계량주의적 방법론이 널리 활용되고 있었다. 전통적인 직관과 지혜만으로 갈등을 설명하기에는 뭔가 부족해 실증적인 연구에 빠져들던 때였다. 전쟁과 평화의 역사를 수많은 데이터(변수)로 만들고, 이들 사이의 관계를 수학적으로 분석하면 어떤 패턴이 나올 것이므로 갈등의 원인을 찾아내 방지할 수 있다고 그들은 생각했다.

이렇게 해서 완성한 것이 저 유명한 ‘갈등과 전쟁에 관한 이해’다. 전 5권으로 된 이 저서는 미국의 프리덤하우스에 의해 지난 100년 동안 출간된 책 중 ‘반드시 읽어야 할 책’으로 선정되기도 했다. 제5권 ‘정의로운 평화’가 1981년 나왔으니까 러멜로서는 구상에서 완성까지 20년이 걸린 셈이다.

이상우는 1973년 귀국해 경희대를 거쳐 서강대에 자리를 잡았지만 러멜과의 공동연구를 계속한다. 스승의 제자 사랑도 이어진다. 당시 국내의 교수 월급은 8만 원(약 200달러)으로 살기가 빠듯했다. 그런 그에게 러멜은 매월 200달러를 보내준다. 자신이 쓰고 있는 책의 원고를 장(章)별로 보내주면 이를 읽고 코멘트를 달아주는 조건이었다.

러멜과 이상우가 평생 천착해 얻은 결론은 뭘까. 간단명료하다. 자유의 증진만이 인류를 전쟁의 공포에서 구하고 평화를 가져다준다는 것이다. 그가 요즘 전쟁 대신 ‘나쁜 정부’에 의한 자국민(自國民) 학살에 관심을 쏟고 있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학문적 포커스가 ‘민주평화론’에서 ‘인간안보론’으로 넘어간 셈이라고나 할까.

韓美관계도 人緣의 벽돌담 쌓듯

러멜과 이상우는 물론 많은 계량주의 정치학자들에 대한 학계의 시선이 반드시 긍정적인 것만은 아니다. 전통적 방법에 집착하는 일부 학자는 여전히 냉소적이다. 러멜과 이상우도 ‘보수우파’로 몰려 고생깨나 했다. 하지만 정치학 또는 국제정치학을 역사에 대한 반복 기술(記述)과 설명 수준에서 벗어나게 한 이들의 기여는 평가받아야 한다.

아무려면 어떤가. 소중한 것은 러멜과 이상우가 맺고 꽃피워온 사제의 연(緣)이다. 인연은 벽돌 같아서 쌓기는 어려워도 허물기는 쉽다. 한미관계도 그렇다. 좋은 인연은 쌓이고 쌓일수록 아름다운 법이다. 이틀 후면 스승의 날이다. 두 사람에게 박수를 보낸다.

이재호 논설실장 leejaeho@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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