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정호 칼럼]독일에서 본 일본의 보통국가론

  • 입력 2005년 6월 9일 03시 05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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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를린은 지금 도시 전체가 1945년의 현대사를 회고 성찰하는 거대한 역사 전시장이 된 듯싶다.

제2차 세계대전의 처절한 종말과 히틀러 제3제국의 몰락을 갖가지 실물과 동영상을 통해 보여 주고 있는 중심무대는 베를린의 심장부에 자리 잡은 역사박물관. 운터덴린덴 대로가 시작되는 곳에 자리한 구 역사박물관과 바로 뒤에 중국계 미국인 I M 페이가 설계한 신 역사박물관은 전관이 2차대전과 그 전후의 현대사에 관한 전시장이 되고 있다. 1945년 4월 30일 히틀러의 자살에 이르기까지 시가의 9할이 점령당했는데도 단말마의 발악 같은 항전을 하고 있는 15, 16세의 히틀러 유겐트(청소년). 패전과 동시에 시작되는 소련군의 부녀자 겁탈과 노략질. 꿀꿀이죽 배급에 몰려드는 아사 직전의 시민들. 죽은 군마(軍馬)의 살을 베어 먹으려 몰려든 고기 맛에 주린 노소남녀. 아우슈비츠 닷하우 등 강제수용소의 지옥도. 승전보에 환호하는 광란의 모스크바 파리 뉴욕의 시민들….

역사박물관 못지않게 전쟁의 참극과 인간의 광기를 초차원의 죽음과 같은 절대적 침묵으로 보여 주고 있는 것이 금년 5월에 개장된 홀로코스트(유대인 학살) 기념비. 브란덴부르크 성문 바로 옆의 금싸라기 같은 땅 2만m²의 거대한 터전에 세워진 이 유대인 학살 기념 광장에는 폭 0.8m, 길이 2.38m의 장방형 콘크리트 석비(石碑) 2711개가 꽉 차 있다. 높낮이가 다른 평균 8t 무게의 이 무수한 석비에는 단 한 줄의 글귀도, 어떤 상장적인 도형도 없다. 더욱이 이 기념비를 설계한 건축가 페터 아이제만은 그의 조형에 어떠한 상징적 해석도 거부하고 있다. 그럴수록 그것은 통일 독일의 수도 한복판에 입을 벌리고 있는 블랙홀 같은 인상을 지울 수 없다. 혹은 도심의 잡답 속의 침묵, 삶의 한복판에 자리 잡은 죽음, 또는 인간의 어리석음이 활개 치는 무대인 ‘역사’의 무의미에 대한 입을 다문 교사(敎唆)라고나 할 것인지….

홀로코스트 기념비에 대해선 그 위치나 크기, 설계 자체에 대해서 독일 안팎에서 격렬한 논쟁이 있었다. 그러나 완공된 기념비와 그 광장은 그러한 모든 논쟁을 잘 버텨 내고 앞으로도 잘 ‘이겨’ 갈 것만 같다.

한편 홀로코스트 기념비만큼이나 뜨거운 논쟁이 벌어진 베를린의 또 다른 기념비가 무명용사의 기념비가 된 ‘노이에 밧헤(새 초병소)’. 노무현 대통령도 독일을 방문해서 헌화한 이곳에는 독일 표현주의 미술의 거장 케테 콜비츠가 1930년대에 제작한 피에타 상이 천장이 높은 거대한 석조 건물 한가운데에 자리하고 있다.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난 규수 작가 케테는 베를린의 노동자 거주지역에서 병원을 차리고 있던 의사 콜비츠와 결혼한 뒤 그곳에서 도시 프롤레타리아의 비참한 삶을 목격하고 그들을 위한 사랑과 항의를 수많은 작품 속에 담았다. 그녀의 유명한 판화 작품집 ‘방직공의 반란’ 등이 이러한 배경에서 나왔다.

1945년 4월 2차대전 종전 직전에 죽은 케테 콜비츠는 물론 분단 이전의 작가였다. 그러나 그녀를 마치 소비에트 인민예술가처럼 모신 것은 옛 동독 공산 체제였다. 케테 콜비츠는 있는 사람들이 아니라 없는 사람들을 위해 평생 작품 활동을 했던 것도 사실이다. 그렇기에 소비에트 체제와 싸운 사람들이 노이에 밧헤에 하필 콜비츠의 조각을 모신다는 것을 반길 리는 없다. 게다가 피에타 상에서 어머니가 안고 있는 죽은 아들은 전쟁터에서 전사한 군인조차도 아니다. 반론이 충분히 있을 수 있다. 더욱이 이 전몰용사 기념비의 조성은 의회의 논의도, 상이용사회의 검토도, 심지어 작품의 공모조차 거치지 않은 채 정부 수반의 독단으로 이뤄졌다. 그가 바로 보수 기민당의 헬무트 콜 총리였다. 만일 그 당시 총리가 사회민주당 출신이었다면….

역시 독일은 좋은 나라라 생각되었다. 일본에서도 바로 보수 우파의 총리가 결단을 해서 무의미한 전쟁에 목숨을 잃은 수많은 젊은이들을 위한 기념비를 마련할 수는 없는지…그래서 모든 나라 정상이 일본을 방문할 때면 헌화하게 할 수는 없는지…그래야 비로소 일본도 ‘보통국가’가 되는 것은 아닌지….

최정호 객원대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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