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정호칼럼]대통령직의 數理와 倫理

  • 입력 2004년 3월 10일 18시 59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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케네디 대통령의 전기 중에 이런 말이 있다. “그는 날이 갈수록 대통령에 닮아 갔다.”

아무도 대통령으로 태어나지 않는다. 누구나 국민이 선출해 주면 대통령이 되는 것이다. 물론 대통령이 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대선을 치르는 일도 피 말리는 일이지만 당선된 뒤에도 ‘대통령 노릇’ 하기란 이만저만 힘드는 게 아니다. 오죽하면 “이 노릇 못해 먹겠다”는 넋두리가 튀어나왔을까. 바로 그러한 어려움을 뚫고 이겨 나가면서 대선의 승자들은 점차 대통령에 닮아 간다.

▼‘10분의 1’ 그 해괴한 숫자놀음 ▼

노무현 후보도, 이회창 후보와 마찬가지로 대통령으로 태어나진 않았다. 대선 직후 노 당선자가 대통령에 닮지 않은 것도 낙선자 이 후보와 다를 바 없었다. 문제는 그동안 노 당선자가 얼마나 대통령에 닮아졌는가 하는 점이다. 분명한 것은 지금 취임 후 1년 만에 노 대통령이 헌정사상 초유의 심각한 위기에 직면했다는 사실이다.

위기는 적게 잡아도 3중의 것이다. 그 모두가 실은 노 대통령 스스로 뇌관을 마련한 것이다. 첫 번째 뇌관은 해외여행 중 측근 비리가 밝혀지자 불쑥 들고 나온 대통령 재신임문제. 만일 헌법에도 없는 대통령 재신임 투표가 이뤄진다면 표의 향방에 따라선 현직 국가원수가 재임중 물러나야 하는 초비상사태가 발생할 가능성을 노 대통령 자신이 열어 놓았다.

두 번째 뇌관은 더욱 해괴한 숫자 놀음. 노무현 캠프의 불법 선거자금 규모가 한나라당의 10분의 1을 넘으면 대통령 직을 걸고 정계에서 은퇴하겠다는 작년 말 4당 대표 회동에서 한 발언이 그것이다. 국민의 가슴속을 황량하게 만드는 으스스한 말이다.

이미 대통령 자신이 불법 선거자금 유용을 공인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규모가 반대당의 10%에 미치지 못할 때까진 직을 유지하겠다는 말이 도통 무슨 말인가. 그렇다면 헌정 중단을 바라지 않는 이 나라의 착하기만 한 국민은 노 캠프의 불법 선거자금이 새로 밝혀져 그 규모가 불어갈 때마다 한나라당의 그것이 제발 10배가 넘도록 노사모와 함께 하늘에 빌기라도 해야 한다는 말인가. 그렇게 해서 노 캠프의 불법 선거자금 규모가 반대당의 9.99%로 가까스로 억제되었다면, 그것으로 개혁의 기치를 들고 집권한 정권의 윤리성이 보장되는 것일까.

도대체 10 대 1의 수리가 무엇이며 그걸 누가 좌우하는 것인가. 돈을 주는 기업이 노 캠프의 부패지수는 10이요, 이 캠프의 부패지수는 100이라고 계산해서 그 비율대로 돈을 주기라도 했다는 말인가. 많건 적건 주는 대로 불법자금은 덥석 받고 나서 그 액수가 천만다행으로 10분의 1이 못 되었다해서 개혁정치의 체면이 서는 것일까. 아니 그보다 당선 가능성을 평가해서 기업의 불법자금이 노 캠프로 10분의 1만 흘러 갔다면 이 비율에 무슨 의미가 있을까. 국가원수의 윤리성이 이따위 불법자금의 상대적 규모를 셈하는 수리에 좌우돼야 한다는 말인가.

세 번째 뇌관은 마침내 탄핵안 발의에 이른, 총선을 앞둔 대통령의 여러 언동. 대통령 직의 운명이 다시 한번 표결의 수리에 좌우되는 건국 이래 초유의 헌정 위기에 나라가 직면하고 있다. 재적의원의 과반수인 159명 의원의 서명으로 탄핵소추안은 이미 발의됐다. 탄핵안의 가결 여부는 발의에 서명하지 않은 야당 의원 중 몇 명이 더 찬표를 던져 의결 정족수에 모자란 나머지 21표를 채우느냐 여부에 달려 있다.

▼제발 좀더 ‘대통령’에 닮아가길 ▼

열린우리당 쪽에서는 탄핵안의 상정 자체를 원천적으로 봉쇄할 작정인 모양이다. 수리적인 힘이 아니라 물리적인 힘으로 탄핵안을 저지하겠다는 비장한 각오다. 그러나 5년 임기를 보장해서 국민이 선출한 국가원수 직을 이처럼 아슬아슬한 수리의 변덕이나 중과부적의 여당 의원의 든든치 않은 물리력으로 유지해야 된다는 말인가. 그런 수리나 물리력으로 개혁을 내세우는 대통령 직의 윤리성이 보장될 수 있을까.

많은 국민은 노 대통령이 이젠 제발 좀 더 대통령을 닮아 주었으면 하고 빌 뿐이다.

최정호 객원大記者·울산대 석좌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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