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의 눈/로스 두댓]동영상은 폭력의 구실에 불과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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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2년 9월 18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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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스 두댓 뉴욕타임스 칼럼니스트
로스 두댓 뉴욕타임스 칼럼니스트
북부 아프리카와 중동을 뒤덮고 있는 반미 시위가 단지 미국에서 제작된 모욕적인 반이슬람 동영상 때문이라고 여긴다면 큰 실수다.

이런 잘못된 판단으로 이미 몇 가지 실수를 저질렀다. 우선 시위대가 바깥에서 흥분할 때 카이로 주재 미국대사관이 ‘사죄’하는 보도자료를 낸 사실이다. 백악관이 문제의 동영상을 내려 줄 것을 유튜브에 요청한 것도 실수다. 종교·출판의 자유를 규정한 수정헌법 1조를 남용했다는 이유로 영화 제작자를 체포해야 한다고 아이비리그의 교수가 제안한 것도 마찬가지다.

폭도들 앞에서 “너희는 입에 거품을 문 비이성적 집단”이라고 용감하게 꾸짖는 것도 똑같은 잘못된 판단에서 나오는 행동이다. 또 적절한 방법도 아니다.

물론 카이로와 벵가지의 거리에서는 분명히 비이성적인 힘이 작동하고 있다. 하지만 그곳에선 보다 치밀하게 계획된 일이 일어났다. 폭도가 생겨난 것은 그 무례한 영화 때문이 아니다. 미국대사가 죽은 것도 캘리포니아의 콥트교인들이 예언자 무함마드를 모욕하는 영화를 만들어서가 아니다.

지금 우리가 목격하고 있는 것은 구태에서 벗어나지 못한 폭력을 기반으로 한 정치다. 이 바보 같은 동영상은 그저 폭력을 위한 구실에 불과할 뿐이다.

이와 비슷한 일은 과거에도 있었다. 서구인들은 이제 이런 것에 익숙해져야 한다. 단기 재교육이 필요하다면 이번 주에 출간될 살만 루슈디의 회고록을 참고하라. 이란의 종교지도자 아야톨라 호메이니의 살해 위협 속에서 사는 것이 얼마나 비참한지 알 수 있다. 또 다른 많은 사람도 자신의 목숨을 노리는 시위대의 구호로 고통을 받으며 살고 있다.

루슈디뿐 아니라 우리가 이해해야 하는 게 하나 있다. 그가 저서인 ‘악마의 시’에서 이슬람의 예언자를 어떻게 다뤘는지는 중요한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진짜 문제는 이라크와 전쟁을 치른 뒤 혁명의 불꽃을 유지하려던 이란 지도자의 욕망이었고, 자국 총리의 종교적 신실함을 시험하려던 파키스탄 이슬람주의자들의 욕망이었으며, 자신들을 무슬림 사회의 대변인으로 여기는 영국 내 종교적 극단주의자들의 욕망이었다.

마찬가지로 지금의 폭력 사태는 군중의 비이성이 아니라 유혈적인 성향의 현실 정치 때문에 발생한 것이다. 워싱턴포스트가 지적했듯이 이집트인이나 리비아인의 공격은 이집트 근본주의자들인 살라피스트나 리비아의 알카에다 추종 세력 같은 더 극단적인 이슬람주의자가 지배 정당을 상대로 한 계획적인 도발로 보인다. 두 건 모두 9·11테러 기념일에 발생했다는 것이 이를 입증한다.

공격 목표가 된 미국인도 우연히 정해진 대상이 아니다. 대사관과 영사관에 대한 공격은 이슬람 사회에서 아직도 반미주의가 사회의 불만을 잠재우기 위한 대중 결집의 강력한 도구임을 의미한다. 다시 한 번 얘기하지만 영화는 구실이었지 실제 원인이 아니었다.

1989년 당시 정치인들이 루슈디의 사과가 소란을 잠재울 것이라며 보였던 행동은 대부분 무의미했다. 마찬가지로 지금 유튜브를 제약하거나, 미국의 합참의장이 적절한 시기에 반이슬람 영화 제작자에게 전화를 건다고 해도 별 의미가 없을 것이다.

우리가 아랍의 봄 이후 중동에서 목도하는 것은 혁명 이후에 흔히 발생하는 권력투쟁에 해당한다. 벵가지에서는 세속적인 세력과 원리주의자 간의 다툼이, 카이로에서는 무슬림형제단과 그들보다 더 이슬람적인 세력 간의 대결이 벌어지고 있다. 그런 알력은 튀니지부터 예멘까지 여러 이슬람 사회에서 나타나고 있다. 위기의 근원을 정확히 이해하지 않으면 문제는 사라지지 않는다.

로스 두댓 뉴욕타임스 칼럼니스트
#이슬람 시위#동영상#반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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