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요프리즘]권혁범/‘國基’에서 헌법으로

  • 입력 2004년 7월 6일 18시 4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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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나보고 ‘국기를 흔들어 놓는 언행’을 했다고 몰아세운다. 이런 경우 나는 어떤 입장을 취하게 될까? 일단 말문이 막히거나 ‘그런 게 아니라…’ 하며 더듬기 십상이다. 자기방어적인 입장에 놓일 수밖에 없다. 이런 무시무시한 혐의를 받는데 이성적 토론이나 합리적 논쟁이 가능할까? 회의실에 갑자기 누군가 탱크를 몰고 들어오는 격이다.

▼정파적 입장따라 해석 제각각▼

‘불순한 사상’ ‘빨갱이’ ‘수구반동’ 등 이념과 관련된 말들은 잡다한 논쟁을 일순간에 정지시켜 버리는 엄청난 힘을 갖는다. 물론 그런 낙인 때문에 피해를 본 두 정치인이 잇따라 대통령이 되면서, 그 위세는 갑자기 힘을 잃은 태풍처럼 수그러들었다. 하지만 여전히 ‘일단 정지!’의 효험을 가진 말들이 있다. ‘국기’ ‘국가 정체성’ ‘국가 기강’ 등이 대표적인 예다.

최근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가 교도소에서 숨진 ‘비전향 장기수’에 대해 민주화운동의 하나로 일어난 의문사로 판정하자 일부에서 ‘정체성과 국기를 흔드는 반국가적 행위’라며 반발하고 나섰다. 김선일씨 피살사건에 대한 정부의 대응과정에서도 국가 안위와 ‘국기’가 흔들렸다는 비판이 거세다.

국기(國基)는 사전적으로 ‘나라의 기초(바탕)’를 뜻한다. 평범한 이런 단어가 메가톤급 폭탄의 위력을 갖게 된 것은 아직 뿌리 깊게 남아 있는 국가주의 정서 때문이다. ‘국기를 흔드는 행위’라고 하면 한반도 전체가 뿌리째 흔들리는 엄청난 그림이 머릿속에 떠오르지 않는가. 입을 닫는 게 상책이다.

하지만 곰곰이 생각해 보면 ‘국기’는 애매모호한 자의적 개념이다. ‘나라의 바탕’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가치관과 이념 또는 이해관계에 따라 제각각일 수밖에 없다. ‘국기’를 앞세우는 게 한국사회의 민주주의와 번영에 도움이 될까? 권위주의적 국가주의 뉘앙스를 강하게 풍기는 ‘국기’를 통해 사회 전체의 이익과 안전이 담보되기보다는 특정한 세력의 정파적 이익이 슬며시 정당화되기 십상이다.

그 안에 뭐가 있는가? 양파처럼 그 안에 특정한 실체가 없다. 아무리 벗겨 봐야 알맹이는 나오지 않는다. 어떤 이들은 자유민주주의라고 못을 박겠지만 문제는 그렇게 간단치 않다.

자유민주주의의 핵심 중의 하나는 사상·양심·표현의 자유다. 자유민주주의의 핵심은 바로 그 자체를 부정하는 자유까지 인정하는 데에 있다 하지 않는가. 미국 같은 보수적 자유민주주의 나라조차 ‘성조기’를 태우는 급진적 행위를 처벌하는 법률을 통과시키지 못하고 결국 그것을 ‘표현의 자유’로 인정하고 만 것은 같은 이유에서다. 그러니 만약 국기의 요체가 자유민주주의라고 주장하고 싶다면 동시에 ‘국기를 흔들어 놓는’ 자유를 인정해야 하는 모순을 수용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의문사위원회의 결정에는 분명 논란의 여지가 있다. 나는 장기수들이 지향했던 이념적 표적에 동의하지 않는다. 단지 그들의 전향거부 투쟁이 개인 내면의 자유를 지켜내려 한 것이라는 점에서 우리 자유민주주의의 용인의 범위에 들어올 수 없는 것인지는 한번쯤 생각하게 된다.

사실 우리 헌법에는 민주주의의 여러 가능성이 열려 있다. 제1조에서는 ‘민주공화국’임을 선언하고 국민 주권론을 명시했을 뿐이다. 하지만 헌법은 ‘국기’에 대해 아무런 말씀이 없다.

▼헌법토대로 용인범위 따져봐야▼

더 중요한 것은 대한민국 국적을 가진 시민들이 이념과 가치관을 넘어서 합의할 수 있는 기본 텍스트는 오로지 헌법밖에 없다는 사실이다. 탄핵정국 위기 속에서 한국사회가 비교적 안정을 유지했던 것도 탄핵 반대론자나 찬성론자, 여야 모두 결국 헌법에 의거한 ‘헌법재판소’의 최종결정을 받아들였기에 가능했던 일이다.

이제 사사건건 초헌법적인 ‘국기’ ‘정체성’을 내미는 관행에서 벗어나야 한다. 의문사위의 결정이나 피살사건에 대한 정부의 대응방식에 문제가 있다면 구체적인 헌법 조문을 놓고 우리의 자유민주주의가 용인할 수 있는 범위는 어디까지인지를 따져 보고 공론화해야 한다. 그것이 민주화 17년을 넘긴 사회에 더 어울린다. 그리고 훨씬 더 실용적이다.

권혁범 대전대 교수·정치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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