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허대석]연명치료 중단 법제화가 시급한 이유

  • 동아일보
  • 입력 2012년 12월 3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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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대석 서울대 의대 교수
허대석 서울대 의대 교수
지난달 2일 대통령 소속 국가생명윤리위원회는 생명 연장만을 위한 무의미한 연명치료 중단을 허용하기 위한 법적 근거 마련을 적극 추진하라고 권고했다. 법률을 만들거나 대한의학회 지침 제정 등의 방안이 거론된다. 다만 위원회는 환자 본인이 의식불명인 상태에서 환자의 의사를 추정한 연명치료 중단 등 논란이 있는 사안에 대해서는 의료현장의 현실 및 국민 인식 조사와 연구를 시행한 후 공론화를 추진하도록 결정했다.

국민들 90% 병원에서 마지막 삶

1997년 보라매병원에서 환자의 인공호흡기를 제거한 의사가 살인죄로 기소된 이후, 2009년 세브란스병원에서 환자의 인공호흡기를 떼게 해 달라는 가족들의 요구를 법원이 받아들인 김 할머니 사건을 거쳐, 올해 5월 중환자실에서 할아버지가 할머니의 인공호흡기 연결선을 자른 사건에 이르기까지 유사한 사건이 끊이지 않고 있다.

이러한 시점에서 이번 생명윤리위원회의 권고는 무의미한 연명치료 중단에 대한 끝없는 소모적 논의에 마침표를 찍고 의료현장의 혼란을 최소화하겠다는 결의를 나타낸 것으로 보인다.

1960년대부터 발전한 심폐소생술과 인공호흡기는 많은 급성 환자의 생명을 구해온 필수 의료기술이지만, 만성질환으로 오랜 기간 투병해오던 회생 가능성이 없는 환자에게까지 연명시술을 하는 일이 점점 늘어나게 되었다. 말기 환자들에게 임종 과정에서의 연명시술은 불필요한 고통의 시간을 연장시키는 비윤리적 행위라는 비판이 제기되면서 1970년대 후반부터 선진국에서는 무의미한 연명치료를 하지 않도록 대부분 법제화되었다.

다른 나라와 달리 우리나라에서 사회적 합의를 이루지 못하고 법제화가 계속 미루어지는 이유는 ‘무의미한 연명치료 중단 허용’은 생명의 존엄성을 해치는 제도라는 오해의 벽이다. 말기 환자들이 임종 과정에서 인공호흡기와 같은 연명시술을 대부분 받고 있는데, 법제화를 통해서 중단하려고 시도하는 것처럼 잘못 이해하고 있다는 이야기다.

그러나 실제 통계를 살펴보면 우리나라에는 1년에 18만여 명의 만성질환자가 말기상태로 사망하는데, 임종 과정에서 15만 명(83%)은 심폐소생술이나 인공호흡기를 거부하거나 중단했고 연명치료를 시도하는 환자 3만여 명도 본인이나 가족이 책임 있는 결정을 내리지 못한 상태에서 의료진이 방어적 진료의 일환으로 진행하고 있다.

또 임종이 임박했을 때 연명치료 여부를 본인이 명확하게 표현하는 사례는 5%도 되지 않고 이 중에서 사전의료의향서에 직접 서명하는 사례는 1%에 불과하다. 대부분의 경우 환자에게 임종이 임박했다는 사실을 알리지도 못하고 있으며, 병원의 전공의와 가족들이 상의하여 연명치료 여부를 대리 결정하는 사례가 대부분이다.

죽음은 더이상 개인의 문제 아니다

연명치료에 대한 국가적인 규정이나 일관된 병원 지침이 없기 때문에 이러한 결정들이 비전문적 판단이나 비윤리적으로 이루어질 위험이 있고, 의료진과 보호자가 협의하여 연명치료 중단을 결정했다고 하더라도, 제3자가 이의를 제기했을 때 법의 보호를 받지 못하고 있다. 무의미한 연명치료 중단에 대한 법이 있었다면 보라매사건이나 김 할머니 사건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무의미한 연명치료 중단’에 대한 법은 ‘연명치료 중단’을 목적으로 한 것이 아니고 시행 여부의 결정 과정에 좀 더 전문적인 의료진이 참여하고 그 과정이 보다 윤리적으로 이루어지게 함으로써 환자의 인권을 보호하는 것을 주목표로 한다.

90%에 가까운 국민이 병원에서 삶의 마지막을 맞이하는 오늘날, 죽음은 더이상 개인의 문제가 아니며 그 사회의 도덕적 경제적 과학적 가치들이 관여하고 있다. 생명의 존엄성이라는 가치는 사회제도 안에서 제대로 된 법을 통해서만 지킬 수 있다.

허대석 서울대 의대 교수
#연명치료 중단#법제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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