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최주현]곪아가는 ‘여의사 성폭행’ 상처

  • 동아일보
  • 입력 2012년 8월 13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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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주현 대한전공의협의회 사무총장
최주현 대한전공의협의회 사무총장
병원 인턴 A가 임신했다. 그녀에게 임신은 축복이라기보다는 재앙이다. 레지던트로 지원하고자 하는 전공과목 교수진은 그녀의 임용을 꺼릴 것이다. 출산휴가 동안 대체 인력이 없으니 동료들의 시선도 곱지 않다. 임신과 출산이 오히려 큰 걱정거리가 된다. 조심스레 이를 돌이킬 수 있는 방법이 없을까 생각하게 된다. 또 다른 1년차 레지던트 B가 막 성폭행의 위기에서 벗어났을 때, 충격과 비탄에서 빠져나오기도 전에 또 다른 고민이 찾아온다. 만약 사실을 폭로할 경우 그녀를 범하려 했던 교수를 통해 오히려 자신에게 불리한 소문이 병원 내에 퍼질 수도 있기 때문이다.

평판 탓에 입도 못 열고 마음고생

팀워크가 무엇보다 중요한 전공의 업무상 ‘조신하지 못한 전공의’에게 돌아오는 업무 평가는 박하게 마련이다. ‘평판이 좋지 않은 전공의’라는 꼬리표는 어쩌면 평생 걸림돌이 될 수도 있다.

의료법 77조에 따라 수련병원 또는 수련기관에서 전문의 자격을 얻기 위해 수련을 받는 의사를 전공의(專攻醫)라고 하며, 여기에는 인턴 과정과 레지던트 과정이 있다. 전공의 과정은 주당 100시간 이상의 장시간 근로 및 특성상 정확성과 신속성을 요하는 고강도 업무로 잘 알려져 있으며, 수련병원 내 의사 사회는 ‘도제 제도’라 일컬어지는 수련 과정 때문에 상급자와 하급자의 위계질서가 대단히 명확한 대표적인 계층 사회이다.

대한병원협회에 따르면 올해를 기준으로 인턴은 32%가, 레지던트는 35%가 여자로, 여성 의사의 비율이 갈수록 증가하고 있으나, 여의사는 여전히 소수이고 성적 차별에 시달리고 있다.

대한전공의협의회가 2011년 여성 전공의 414명을 대상으로 여성 전공의의 수련 실태를 조사해 보니 수련 과정의 폭력과 관련해 임신 출산 과정에서의 병원의 압박 및 성희롱이나 성추행의 문제가 집중 거론됐다.

한국여자의사회가 2010년 여자 전공의 1223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설문조사에서도 18.6%는 가끔, 0.6%는 자주 성희롱을 경험했다고 응답했다. 2010년 10월 12일 국립중앙의료원이 주최한 ‘여전공의 출산·양육 환경 개선 방안’ 심포지엄에서 대한전공의협의회는 여의사가 수련병원에 전공의로 지원할 때 “수련 기간에 출산하지 않겠다”는 내용의 각서 작성 관행이 여전히 있다는 충격적인 실태를 공개하기도 했다.

‘평등해야 더 건강하다’라는 명제는 대부분의 사회에서 진실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영국의 사회역학자 리처드 윌킨슨에 따르면 불평등한 사회에서 낮은 사회적 지위에 있는 사람들은 일과 삶에 대한 통제력이 낮아 심한 스트레스를 받게 되며, 사회적 관계가 빈약한 사회에서 위계적 우위를 점하기 위한 경쟁이 더욱 격화됨으로써 상위 계층의 건강 또한 평균적으로 악화된다. 차별 받는 사회는 건강하지 않다. 전공의, 그중에서도 차별 받는 여성 의사의 삶은 지난(至難)하다. 자신이 건강하지 않은데 아픈 사람을 치료한다는 것은 어불성설에 가깝다.

자신이 아픈데 누구를 치료할까

대한민국의 의사들이 국민의 건강과 생명을 위해 노력하고 있지만, 고된 업무와 지식 습득에 많은 시간을 할애하고 있어 기존의 불합리한 제도적 문제를 개선하는 데에는 무심한 경향이 있다. 가정의 건강과 평안을 위해 힘쓰는 의사들이 정작 의료계 내부에서 벌어지는 가혹하고 모순된 환부(患部)에 대해 회피하는 것은 위선이자 기만일 것이다.

최근 의사들에 의한 성범죄 추문이 언론에 오르내리며 의사 집단의 윤리의식이 도마에 올랐다. 어느 집단이나 완벽할 수 없겠으나 의사 동료에 대한 성차별적 관행조차 해결하지 못하고서야 외부의 비난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상처가 썩으면 빨리 도려낼수록 좋다는 것이 여전한 의학적 진리이다.

최주현 대한전공의협의회 사무총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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