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窓]세상을 밝히는 선·생·님

  • 입력 2009년 5월 1일 02시 56분


맞벌이 부모 둔 학생 잦은 결석에

달동네 20번 찾아 제자-부모 설득

“밝게 변한 딸 보면 선생님 생각나”

‘그 선생님은 부모인 제가 포기했던 아이를 다잡아 주신 분입니다. 그런데 졸업식 때 그 흔한 꽃 한 송이도 드리지 못했습니다. 너무나 고마운 분인데….’

최근 서울시교육청에 편지 한 통이 배달됐다. 발신인은 사업에 실패하고 월세 20만 원의 궁핍한 살림살이를 하고 있는 박용필(가명·42) 씨다. 20년 만에 편지를 처음 쓴 그에게 작년에 큰 위기가 있었다.

새벽같이 공사판 일감을 찾아 나섰다 저녁 늦게 귀가를 하던 10월의 쌀쌀한 어느 날 밤 딸아이 담임선생님이 집으로 찾아왔다. “주은(가명)이가 결석이 너무 잦아 졸업이 힘들게 됐습니다. 학교에 꼭 보내주세요.”

박 씨는 하늘이 무너지는 줄 알았다. 아이 엄마와 일감 때문에 떨어져 살다 보니 이런 일도 생기는구나 싶어 가슴이 철렁했다. 추운 날씨에 가방을 매고 나간 딸이 하루 종일 돈도 없이 어디서 무엇을 하며 시간을 보냈을지를 생각하니 가슴이 미어졌다.

박 씨는 딸을 달래 교문 앞까지 데리고 갔지만 딸은 학교에 가지 않았다. 박 씨는 결국 선생님께 전화를 해 “아이를 잊어 달라”고 했다. 그러나 선생님은 “부모님은 절대 그러시면 안 된다”고 답했다. 이후 선생님은 20번도 넘게 달동네 박 씨의 집을 오가며 아이를 설득했다. 집에 씻을 만한 시설이 마땅치 않은 것을 알고 아이를 목욕탕에도 데려갔다.

주은이는 결국 마음을 바꿨다. “아빠, 저 선생님하고 약속했어요. 다시는 부모님 속상하게 해드리지 않겠다고요.” 올 2월 주은이 졸업식에 참석한 박 씨는 자신의 신세가 더 없이 처량하다고 생각했다. “우리 인생이 참 힘들게 꼬였다. 저런 선생님께 작은 선물하나 해드릴 형편이 못되니….” 박 씨가 그날 부인에게 한 말이다.

고교 1학년에 진학한 주은이는 지금은 박 씨가 밤늦게 귀가하면 “저녁은 드셨느냐”며 밝게 인사를 한다. 박 씨는 “아이의 밝아진 모습을 볼 때마다 선생님 생각이 나서 편지를 쓰게 됐다”고 말했다.

주은이는 요즘 용돈을 조금씩 모으고 있다. 선생님을 찾아뵐 때 작은 성의라도 표현하고 싶은 마음에서다. 박 씨는 “아이가 요즘도 선생님 얘기를 자주 한다”며 “선생님과 주은이 사이에 오고간 얘기를 다 알 수는 없지만 아이가 이렇게 선생님을 찾는 것을 보면 마음을 다 담아 주신 것 같아 목이 멘다”고 말했다.

주인공인 서울 성동구 옥정중학교 김혜옥 교사는 “나보다 훌륭한 분이 더 많다”며 인터뷰를 사양했다. 동료 교사는 “학생들 지도에 열성을 다한다는 평판 때문에 교육청에 별도로 요청해 모셔온 분”이라고 말했다.

지난해 이 학교에 ‘스카우트’된 그는 올 3월 갑상샘암 수술을 받고 휴직했다가 5월 1일부터 다시 출근한다.

허진석 기자 jameshuh@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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