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정적인 삼바의 나라로 알려진 브라질. 이곳에선 낡은 건물이든 새 건물이든 가리지 않고 손바닥만 한 공간만 생기면 곧바로 낙서판으로 변신한다. 스프레이 낙서 때문에 골머리를 앓던 브라질 정부는 ‘그래피티 라이터(graffiti writer)’를 고용해 건물 외벽에 낙서 대신 한 폭의 예술 작품을 그려놓아 무분별한 낙서를 막았다. 그래피티란 붓이나 다른 도구를 사용하지 않고 오로지 스프레이 페인트만을 사용해 벽이나 창문 등에 그린 그림을 뜻한다. 이 그래피티 천국인 브라질에서 건너온 그래피티 라이터가 서울 마포구에서 재능 기부활동을 펼치고 있어 화제다.
마포구 도화동 공덕로터리 부근 ‘새창고개길’에는 주민들의 눈살을 찌푸리게 하는 지하보도가 있다. 약 길이 20m에 높이 2.2m인 이 지하보도는 칙칙한 회색 벽에 그려진 낙서 때문에 음침한 분위기를 풍겨 그동안 주민들의 민원이 끊이지 않았다. 이 지하보도에 낙서 대신 아름다운 벽화를 그려 넣는 자원봉사자를 찾던 도화동 주민센터는 홍익대 미대에 수소문하던 중 깜짝 놀랄 만한 사실을 알게 됐다.
브라질에서 그래피티 라이터로 활동하던 교포2세 청년이 마침 한국어 공부를 위해 국내에 머물고 있었던 것. 브라질에서 태어나 상파울루에 있는 마켄지대에서 디자인 대학원을 나온 브루노 양 씨(25)가 바로 그 주인공이다. 국내 비정부기구(NGO)인 ‘참밍’에서 봉사활동을 하던 양 씨는 주민센터의 제안을 흔쾌히 받아들여 무료로 그래피티 작업을 시작했다.
21일 도화동 지하보도에서 만난 양 씨는 추운 날씨에도 불구하고 스프레이를 손에 든 채 그래피티 작업에 여념이 없었다. 칙칙한 회색 벽에 분홍 초록 파란색을 칠하자 점점 새로운 모습으로 변해갔다. 40% 정도 진행됐지만 낙서만 가득했던 지하보도에 형형색색의 그림이 하나둘씩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양 씨는 자연과 음악, 여자를 소재로 도화동을 상징하는 복숭아꽃을 표현하는 중이다.
양 씨는 8년 전 취미로 그래피티를 시작했다. 대학원을 졸업하며 일본계 자동차 회사에서 1년간 디자인 업무를 했던 양 씨는 틀에 박힌 일에서 벗어나고 싶어 회사를 그만두고 그래피티 라이터로 활동하기 시작했다. 한 달에 약 2000달러(약 230만 원)가 보장된 직장이었지만 오히려 그만둔 이후 수입은 더 늘었다. 브라질에서 1년 동안 작업했던 작품만 200여 점으로 한 번 작업하고 최소 10만 원에서 많게는 800만 원까지 받았다. 양 씨는 “브라질에서 축구선수만큼 유명한 직업이 바로 그래피티 라이터”라며 “비좁은 사무실에서 벗어나 넓은 건물 외벽에 스프레이 하나로 자유롭게 그림을 그리고 싶어 택한 직업”이라고 말했다.
그는 브라질에서 공공유산을 재건하고 복원하는 사회공헌 프로젝트에도 참여하고 감옥에 수감 중인 젊은이들에게 그래피티를 가르쳐 사회복귀를 돕는 봉사활동을 하기도 했다. 올해 여름 한국에 온 뒤 곳곳에서 그래피티 작업을 부탁 받았지만 자신의 작품이 상업적으로 이용될까봐 번번이 고사하다 자신의 재능을 기부하는 차원에서 지하보도 그래피티 작업을 시작했다. 양 씨는 작업을 마치고 본국으로 돌아가기 전까지 마포구와 함께 동네 곳곳에 그래피티 작업을 할 계획이다.
먼저 그려놓은 까만 나뭇가지 위에 어떤 모양으로 녹색 나뭇잎과 새를 그려야 할지 이리저리 고민하던 양 씨는 “작업은 즐겁지만 이렇게 추운 날씨는 처음 겪어봐 겨울나기가 걱정”이라며 환하게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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