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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일보|사회

“풍양 조씨 모여살던 집성촌… 지금은 기업회장 사는 부촌”

입력 2018-05-15 03:00업데이트 2018-05-15 09: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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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고향 서울]<6> 서초구 형촌마을 12대 토박이 조경구씨
7일 서울 서초구 우면동 형촌마을 가운데 남아있는 회화나무. 수령이 220여 년인 것으로 추정되는 마을 보호수로, 주민들은 이 나무 밑에서 집안의 안녕을 빌었다. 김재명 기자 base@donga.com
조경구 씨(82)는 12대째 서울 서초구 우면산 자락에 자리한 형촌마을에 살고 있다. 이곳은 풍양 조씨의 집성촌이었다.

“광산 김씨, 김해 허씨도 몇몇 있지만 그래도 조씨가 서른 집쯤 됐나, 제일 많았어.”

조 씨는 82년간 한 번도 이곳을 떠나지 않았다. 6·25전쟁이 났을 때도 그를 비롯해 피붙이들은 고향을 떠나지 않았다.

“우면산 자락 안쪽에 있어서 남쪽으로 가는 인민군이 지날 길목이 아니었지.”

그는 지리적 환경만으로 난리를 피한 거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마을의 평안을 빌던 산신제(山神祭) 효험 덕분이라고 생각했다. 형촌마을의 산신제는 지금도 매년 음력 10월 초하루 뒷산 당집(신당) 앞에서 열린다.

○ 5차례나 바뀐 행정구역

전쟁통에도 온전했던 마을은 1978년부터 바뀌기 시작했다. 형촌마을 행정구역은 5차례나 바뀌었다. 조선 후기까지 경기 과천군이었는데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으로 시흥군이 됐다. 20여 년 후 1963년에는 서울 영등포구가 됐다. 1973년에 영등포구에서 성동구로 바뀌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형촌마을 주민의 삶은 크게 바뀌지 않았다. 마을이 달라지기 시작한 건 1975년 10월 강남구에 편입되고 3년 후 취락구조 개선사업을 추진하면서부터다.

당시 주택은 마을 곳곳에 논밭을 끼고 흩어져 있었다. 한자리에 주택을 모았다. 마차 하나 겨우 지나던 마을 진입로와 리어카도 지나기 어려웠던 좁은 흙길은 각각 폭 8m와 6m 길로 바뀌었다.

취락구조 개선이 끝난 1980년대 즈음 집성촌을 이루던 일가친척이 조금씩 흩어지기 시작했다. 1972년 개발제한구역으로 지정됐던 근처의 ‘용마루(지붕 중앙의 마루) 딱지’가 장당 900만∼1200만 원을 호가했다. 용마루 딱지는 이축권(개발제한구역의 주택 소유자가 근처 다른 개발제한구역에 건물을 옮겨 지을 수 있는 권리)을 말한다.

조 씨는 “그 돈이면 왕십리나 성남에 고래등 같은 집을 살 수 있다며 많이들 떠나갔다”고 말했다. 떠나간 원주민의 자리를 채운 건 ‘있는 사람들’이었다. 조 씨는 “처음에는 은행장이나 구의원 같은 사람들이 오더니 나중에는 기업 회장같이 돈 있는 사람들이 왔다”고 말했다. 현재도 이곳에는 대기업 회장이나 학원 이사장 등이 살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 지금도 매년 마을 위한 산신제 열려

이제 형촌마을에서는 옛 풍경과 사람을 찾아보기 어렵다. 하지만 예나 지금이나 다름없는 것도 있다. 마을의 안녕을 비는 산신제다. 주민 20여 명이 지금도 매해 음력 10월 초하루 뒷산 당집(신당)에 모인다.

“예전에는 나무로 됐었는데 다 삭아서…. 한 15년 전에 고쳤나.”

10분가량 뒷산을 올라가면 당집이 보인다. 3.3m² 남짓한 작은 건물이다. 회색 시멘트벽에 흰색 슬레이트로 지붕을 올렸다. 처음 나무로 지어진 탓에 오랜 세월 비바람을 맞으며 훼손되자 수리한 것이다. 자물쇠를 열고 들어간 공간 안에는 제사를 지낼 때 쓰는 나무상과 그릇, 축문, 사람 이름이 적힌 오래된 한지가 비닐에 싸여 있다.

“해마다 당주(堂主)를 지낸 사람들 이름이야. 무진년 아무개, 병술년 아무개….”

과거에는 1년 내에 집안에 초상을 치르지 않는 등 변고가 없는 ‘깨끗한’ 사람이 당주로 제사를 지냈다. 지금은 한 달로 그 기한이 줄었다. 차례상에 올리는 음식도 소박해졌다. 옛날에는 제사상에 올렸던 소머리 곤 국물과 아낙들이 방아를 찧어 만든 시루떡 서너 판을 온 동네 사람이 나눠 먹었다. 지금은 밤과 대추, 배, 사과, 산적만을 올린다.

“지금은 많이 간소해졌지. 하지만 마을 사람들 무탈하고 농사 잘되게 해달라는 축문은 그대로 읽어.”

당집과 함께 마을 한가운데 회화나무도 변함없이 자리를 지키고 있다. 220년이 훌쩍 넘은 고목이다. 산신제 후 한 달 동안 집집마다 각자 날을 잡아 고사떡을 차려놓고 가정의 평화를 빌던 나무다.

조 씨는 “우리까지 죽으면 누가 이 마을을 기억해줄지 모르겠지만 그래도 이 나무는 앞으로 계속 마을을 지키고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김예윤 기자 yeah@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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