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50대, 2006년의 초상]<2>아낌없이 주는 나무

입력 2006-11-17 02:57수정 2009-10-07 12: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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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부부는 50대가 되어서야 비로소 서로의 가치를 안다. 남은 인생의 가장 오랜 동반자가 될 존재는 남편 혹은 아내라는 것을 알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여전히 돈이 있으면 배우자에게 투자하는 것이 아니라 자식에게 주겠다고 하는 이율배반에 사로잡혀 있다. 동아일보 자료 사진
《중소기업 부장인 박모(54·경기 시흥시) 씨는 올해 초 아내의 빚 때문에 집안이 발칵 뒤집히는 일을 당했다. 자신이 모르는 아내의 빚이 5000만 원을 넘었다.

올해 대학에 입학한 둘째딸의 과외비 때문이었다. 2년 전 첫째를 대학에 보낼 때부터 과외비를 대느라 신용카드 대출로 ‘돌려막기’를 한 것.

“애들 교육비에 썼다는데, 아내에게 고함만 칠 수는 없더라고요. 결국 집을 담보로 대출을 받아 빚을 갚을 수밖에 없었죠.”

외환위기 이후 간신히 버텨 왔지만 박 씨는 언제 회사를 그만둬야 할지 모른다는 불안에 시달리고 있다. 직장생활 32년째. 재취업은 나이 탓에 쉽지 않고 그나마 갖고 있는 집 한 채도 담보 탓에 온전한 재산이 아니다.

그는 “그렇게 쏟아 붓고도 모자라 딸들 결혼비용 걱정을 하는 아내 모습이 한심하다”면서도 “딸들을 외면할 수도 없는 것 아니냐”고 말했다.

집을 팔아 차라리 낙향해서 마음이라도 편하게 살아보자고 넌지시 아내를 떠보았지만 아내는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갈 테면 혼자 가랍니다. 사실 남편이라는 존재가 돈벌어다 주는 거 외에는 아내에게 별 의미도 없는 것 같아요. 늘 하숙생처럼 살아왔으니…. 옛날처럼 자식한테 헌신하면 부양받을 수 있는 것도 아니고….”》

50대는 당혹스럽다. 바뀐 사회는 ‘50대 이후부터 새 삶을 찾으라’고 요구하지만 이들은 여전히 자식에 매인 채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다.

서울시립대 이윤석(도시사회학) 교수는 “50대는 혈연과 직장 등 집단 중심으로 살아왔으나 이제는 각자 알아서 사는 시대를 맞았다”며 “현실적으로 인생의 가장 오랜 길벗이 될 사람은 배우자밖에 없다는 걸 알지만 행동은 자식을 향해 있는 모순에 빠져 있다”고 말했다.

○생각은 배우자에게, 행동은 자식에게

중견 건설업체의 인사홍보담당 임원인 김모(47) 씨는 지난해 대졸 신입사원을 뽑았다가 황당한 경험을 했다.

신입사원 40명 가운데 절반 이상이 1년 새 회사를 그만둔 것이다. 그는 다음 번 채용 때 참고하기 위해 사원들 집에 일일이 전화를 했다가 몇몇 부모들과도 통화를 하게 됐다.

“애가 너무 힘들어해요.” “아직 우리 아이 고생시키지 않을 능력은 돼요.” “딴 직장 알아보고 안 되면 유학 보내려고요.”

김 씨는 “물론 일부 부모의 얘기라는 것을 인정한다”면서도 “대학까지 졸업시킨 자식에게 여전히 퍼주기만 하려는 부모들을 이해할 수 없다”고 머리를 저었다.

본보가 실시한 ‘한국의 50대 정체성’ 설문조사에서 응답한 50대 862명은 ‘앞으로 삶에서 가장 믿고 의지할 대상’으로 57.5%가 배우자를 꼽았다. 자녀라는 응답은 고작 13.6%.

반면 앞으로 돈을 가장 많이 쓸 곳으로는 자신들의 노후준비(31.0%)보다 결혼 등 자녀보조(40.0%)를 지목했다.

배우자와 함께 노후를 대비해야 한다고 생각하면서도 돈은 자식에게 쏟고 있는 것.

2005년 통계청의 가구주 연령별 가계수지를 보면 다른 세대에 비해 50대가 쓰고 남는 돈이 가장 많다.

30대, 40대, 60대는 소득에서 지출을 뺀 돈이 월 40만∼58만 원 선. 이에 비해 50대는 매달 쓰고 남는 돈이 75만 원에 이른다. 노후를 준비할 여력이 있는 셈.

보건사회연구원의 김승권 저출산고령정책연구본부장은 “50대의 경제력은 다른 세대보다 나은 면이 있다”며 “자식에게는 학비까지만 지원하고 나머지는 노후자금으로 모아 두는 인식의 전환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가족문화 변화의 과도기

부산에 사는 전업주부 강모(51) 씨는 지난해부터 멍하게 창밖을 내다보는 시간이 많아졌다. 문득 자신이 쓸모없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강 씨는 지난해와 올해 취업과 군 입대로 아들 둘을 타지로 떠나보냈다.

강 씨는 최근 우울증이 아닐까 하는 생각에 정신과 상담을 받았다. 다행히 심각한 상태는 아니었다. 상실감에서 오는 우울증 초기 증상.

고려대 의대 정신과 이민수 교수는 “자녀를 키우는 과정에서 성취감을 느껴 왔지만 자녀들이 독립하면서 우울증을 호소하는 50대 환자가 많다”고 말했다.

이 교수는 “주부들은 자녀가 떠난 뒤의 ‘빈 둥지 증후군’ 탓에, 남편들은 직장 퇴출 때문에 우울증에 가장 취약한 세대가 50대”라고 설명했다.

부모에 대한 부양 책임을 지지 않는 쪽으로 가족문화가 변화하는 것을 감당해야 하는 것도 50대의 스트레스다.

본보 설문조사에서 ‘자녀가 나를 부양할 것’이라고 응답한 50대는 전체의 28.3%에 불과했다. 50대 10명 중 7명은 자녀로부터 부양받기를 기대하지 않는다는 것.

○“배우자와 새 커뮤니티를 만들라”

서울 용산구 한남동에서 유통업을 하는 장모(44·송파구 가락동) 씨는 남매를 둔 예비 50대.

그는 요즘 주말 아침을 아들이 다니는 초등학교 운동장에서 시작한다. 아들이 같은 학교 친구 14명과 축구 동호회를 하기 때문이다. 이 자리에는 아이들의 부모들도 참여한다.

저녁에는 축구회 학부모들끼리 부부동반 모임도 종종 갖는다. 한 집에 모여 식사를 끝내고 나면 노래방으로 향한다. 이따금 어른들끼리 낚시나 등산도 다닌다.

장 씨는 “아이들 축구 모임이 어른들의 부부동반 동호회가 됐다”며 “50대 이후에 부부가 함께 지낼 준비를 미리 하는 것 같다”고 말했다.

본보는 아파트정보업체인 부동산114와 함께 이달 6∼12일 아파트에 사는 30∼50대 715명을 대상으로 ‘고령화 사회의 공동체’ 설문조사를 했다.

‘노인이 됐을 때 만남이 가장 잦을 대상이나 모임’에 대해 응답자의 30.1%가 취미 등의 동호회를 꼽았다. 다음으로 같은 동네에 사는 이웃(21.2%)이었고 자녀(13.8%)나 친척(7.8%)이라고 응답한 사람은 상대적으로 적었다.

김승권 본부장은 “자녀의 독립이나 퇴직을 상실로 여길 게 아니라 부부가 함께 자기 시간을 누릴 수 있는 새로운 기회로 인식해야 한다”며 “50대에 건강하게 살려면 기존의 혈연, 직장을 대체할 새로운 공동체부터 찾으라”고 조언했다.

■30, 40대로 돌아간다면 “일벌레는 그만… 취미생활 더 하고 싶다”

회계법인에서 20년 넘게 근무하고 있는 회계사 김관영(52) 씨는 회사의 40대 후배들을 보면 부러움만 앞선다고 했다.

“저는 40대에 뼈가 부서져라 회사에서 일만 했어요. 그런데 요즘 후배들은 주말이면 취미생활도 하고 가족과 함께 여행도 떠나더군요. 나도 그렇게 살 걸, 후회가 됩니다.”

김 씨는 “학생 때 했던 야구를 다시 하고 싶지만 몸이 예전 같지 않아 다른 취미생활을 찾고 있는 중”이라며 “친구들은 앞으로 20∼40년은 더 살 건데 지금부터 몸이 감당할 수 있는 래프팅이나 여행이라도 시작하자고 한다”고 말했다.

본보가 지난달 실시한 ‘한국의 50대 정체성’ 설문조사에 따르면 ‘30, 40대로 돌아간다면 현재까지 살아온 삶보다 더 노력하고 싶은 것은’이란 질문에 ‘자기계발과 취미, 사회활동에 더 투자를 하겠다’란 대답이 45.7%를 차지했다. 그 다음이 ‘돈을 더 열심히 벌겠다’(25.1%)와 ‘남편, 아내와 더 많은 시간을 보내고 좋은 관계를 많이 가지겠다’(13.8%)였다.

1970, 80년대 고도 성장기를 거치며 말단사원에서 시작해 중역이 되기까지 ‘주인공’으로 활약했던 현재의 50대는 평일에는 새벽에 출근해 오후 10시에 퇴근하고 주말에도 회사에 나가 밀린 업무를 하는 생활을 ‘미덕’으로 여기며 살았다.

가톨릭대병원 정신과 최종오 교수는 “50대가 청소년기부터 품어 온 가치관은 직장을 가지고 일을 하는 사람은 ‘의미 있는 사람’이고 일을 하지 않으면 ‘의미 없는 사람’이라는 것이었다”고 말했다.

최근에는 스스로 잘 못 노는 50대를 위해 취미생활을 대신 관리해 주는 업체도 등장했다.

시니어 파트너즈(www.thesenior.co.kr)는 50대를 대상으로 다양한 취미모임을 운영하는 한편 등산, 골프, 마라톤에 대한 체계적인 교육을 실시해 주고 있다.

50대들의 사회봉사 활동도 꾸준히 늘고 있는 추세다.

한국자원봉사센터협회(www.kavc.or.kr, 국번 없이 1365) 이연경 대리는 “2005년 12월 기준으로 50세 이상의 자원봉사자는 총 55만 명”이라며 “1년 만에 27만 명이나 늘었다”고 밝혔다.

<특별취재팀>

▽사회부

김광현 기자 kkh@donga.com

이은우 기자 libra@donga.com

김동욱 기자 creating@donga.com

▽교육생활부

김희균 기자 foryou@donga.com

▽문화부

권재현 기자 confetti@donga.com

남원상 기자 surreal@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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