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의 선택, 보수주의]<1>보수의 원산지 텍사스

  • 입력 2005년 3월 6일 18시 09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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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11월 조지 W 부시 대통령의 승리로 끝난 미국 대선은 미국 사회의 보수화를 확인시켜 주는 계기가 됐다. 미국의 보수주의는 1980년대 로널드 레이건 시대를 거쳐 이젠 ‘우파 국가’라는 말이 실감날 정도로 대세를 이뤘다. 부시 정권의 ‘설계사(architect)’로 꼽히는 칼 로브 백악관 비서실 차장 겸 정치고문이 “30년 공화당 정권을 만들 수 있다”고 공언하는 배경도 바로 여기에 있다. 미국의 보수화는 하루아침에 이뤄진 게 아니다. 1968년 이후 치러진 10차례 대선에서 7차례나 공화당이 승리했다. 그러나 미국인들조차 미국의 보수화에 둔감했다. 아니면 보수화의 실체를 인정하기 어려웠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지금은 달라졌다. 뉴욕타임스조차 지난해 1월 ‘보수주의 전담기자’를 따로 둘 정도가 됐다. 부시 행정부 등장 이후 미국 보수주의의 흐름을 주도하는 텍사스 정치와 복음주의 기독교의 현주소가 어디인지, 미국 보수주의를 떠받치는 정책은 무엇인지를 5회에 걸쳐 소개한다.》

《집권 2기 취임식이 열린 1월 20일 밤 부시 대통령은 ‘검은 나비넥타이와 부츠’라는 이름의 텍사스 전통무도회에 참석했다. 그는 마이크를 잡고 “4년 임기를 마치면 내 고향 텍사스로 돌아가겠다”고 외쳤다. 워싱턴까지 몰려와 행사장을 메운 텍사스 사람들은 대통령의 ‘텍사스 사랑’에 환호했다.

부시 대통령은 영락없는 ‘카우보이’ 대통령이다. 그는 휴가를 ‘서부 백악관’으로 불리는 텍사스 주 크로퍼드 목장에서 주로 보낸다. 목장에서 청바지 차림에 카우보이 모자를 쓴 채 일하는 부시 대통령의 모습은 그의 트레이드마크로 통한다. 텍사스 사람들은 “부시 대통령은 똑똑한 사람이지만 우리들의 말로 생각을 표현한다. 닮고 싶은 사람이다”라고 말한다. 텍사스 주의 주도(州都)인 오스틴에서 만난 웨인 슬레이터 댈러스모닝뉴스 정치전문기자의 설명이다.》

▽보수의 원산지 텍사스의 특징=왜 텍사스가 미국 보수주의의 원산지로 통하게 됐을까 하는 의문을 안고 텍사스로 향했다. 오스틴에서 북쪽으로 소도시 웨이코를 거쳐 크로퍼드 목장으로 가는 길은 한적함 그 자체였다. 달리는 차도 거의 없고, 길을 물어볼 사람도 눈에 띄지 않았다.

텍사스의 특징은 크로퍼드 기념품점에 진열된 스티커들이 상징적으로 보여줬다. “남자답게 살고 싶으면 부시를 찍어라.” “텍사스를 귀찮게 하지 말라.” “조국은 사랑하지만, (워싱턴) 정부는 싫다.”

텍사스 사람들은 동북부 ‘신사’들과 거리를 두고 텍사스를 ‘독립된 나라’로 생각한다. 2년 전부터는 초등학생들에게 텍사스의 주기(州旗)인 론스타(Lone Star)에 대한 맹세를 의무화했다. 국기에 대한 맹세와는 별도로 텍사스의 독립성을 가르치기 위해서다.

텍사스 사람들의 특성에 대해 역사학자 T R 페렌바흐는 “2명의 훌륭한 의사나 유명 음악가 또는 상대성이론을 만든 사람을 배출한 가족보다 10만 에이커의 땅을 가진 가족을 더 존경하고 부러워하는 경향이 있다”고 말한 바 있다.

오스틴 시내 어디서나 바라보이는 주 정부와 의회 공용건물은 워싱턴의 국회의사당을 빼닮았다. 그러나 워싱턴의 ‘원본’보다 6m나 높게 지었다.

주 의회는 텍사스가 소망하는 작은 정부를 구현한 곳이다. 의회는 2년에 140일만 열리고, 주 의회 의원 연봉은 7200달러(약 720만 원)에 불과하다. 주 업무에 대한 개입을 최소화한다는 뜻이 담겨 있는 듯했다.

석유 개발과 황무지 개간으로 성장한 텍사스에서는 기업의 앞길을 가로막는 일은 정치적 자살행위로 간주된다. 사회보장을 통한 평등보다 개인의 자유를 중시하다보니 빈부 격차는 오랜 숙제로 남아 있다.

개인생활에 대한 간섭도 금기사항. 부시 대통령은 주지사 시절 “드러내놓지만 않는다면 누구나 권총을 갖고 다닐 수 있다”며 총기 규제를 완화했다.

합법적 사냥 등 총기문화를 즐기는 텍사스 사람들의 기질은 대학 캠퍼스에서도 발견된다. 텍사스 A&M대는 ‘사관생도 모임’으로 유명하다.

남녀 회원들은 해병대처럼 짧은 머리에 군복 같은 제복을 입는다. 기숙사에서 일석점호를 받고, 방학 중에는 군사훈련도 받는다. 장교 예비과정으로 이해하면 곤란하다. 그냥 규모가 큰 동아리일 뿐이다.

▽텍사스 정치=텍사스는 부시 행정부 이후 워싱턴을 장악하고 있다. 대통령 말고도 법무, 교육, 상무장관과 백악관 비서실 차장 등 고위 인사가 텍사스 출신이래서만은 아니다.

부시 대통령이 추진하는 작은 정부, 감세정책, 규제 철폐, 사회보장 및 연금 개혁은 주지사 시절에 시작된 정책들이다.

부시 대통령은 “빈자의 구제도 정부가 나서는 것보다 교회가 맡는 것이 효과적”이라거나 “세금을 더 걷어봐야 중앙정부 관료의 힘만 키워준다”는 생각을 현실화하고 있다.

부시 정부가 비난받아 온 ‘일방주의’도 텍사스 기질과 무관치 않다. A&M대 하비 터커(정치학) 교수는 “텍사스에서는 ‘다른 주도 텍사스 방식을 따라야 한다’는 생각이 강하다”고 말했다.

텍사스 사람들은 동부 대도시와 유럽인의 따가운 눈길을 어떻게 느낄까. 터커 교수는 “유럽과 텍사스를 비교하는 것 자체가 무리”라며 “이곳 사람들은 개의치 않는다”고 말했다.

바로 옆집이라도 자동차로 3∼5분은 가야 하는 텍사스에서 외부 침입자로부터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총을 소지하겠다는 것과 대도시 사람들이 사고와 범죄 예방 차원에서 총기를 제한하려는 것을 비교하는 것은 무리라는 설명이다.

텍사스의 정치적 중요성은 인구 이동에서도 찾을 수 있다. 따뜻한 날씨에 규제가 많지 않아 남부로의 인구 이동이 계속되고 있기 때문이다.

그 결과, 민주당 텃밭을 가리키는 동부 ‘블루스테이트(Blue State)’에서는 25년간이나 하원의원 수가 제자리에 머물렀다. 하원의원 수는 인구비례로 정해진다. 반면 텍사스, 플로리다, 애리조나 등 공화당이 강세인 남부 ‘레드스테이트(Red State)’에서는 20%나 늘었다.

이런 추세가 계속되면 대통령 선거인단의 남부 비중은 계속 높아진다. 결국 텍사스로 대표되는 남부의 벽을 넘지 못하면 집권이 쉽지 않다는 얘기다.


워싱턴=권순택 특파원 maypole@donga.com

오스틴=김승련 특파원 srkim@donga.com

▼공화당의 역사=부시家의 역사▼

미국 공화당은 한 세대에 걸쳐 이념은 실용주의적 귀족주의에서 대중주의로, 지역 기반은 동북부에서 남서부로 이동했다.

이는 조지 W 부시 미 대통령 가문의 변천사와 정확하게 일치한다. 부시 가문은 동북부에서 기업과 금융업으로 부를 축적했다. 상원의원을 지낸 부시 대통령의 할아버지는 귀족풍의 공화당 정치인이었다.

부시 가문과 텍사스의 인연은 동부 명문고와 예일대를 졸업한 아버지 조지 부시 전 대통령이 1948년 개발붐이 한창이던 서부 텍사스에서 일자리를 구한 데에서 시작됐다.

아버지 부시 전 대통령은 석유사업으로 돈을 번 뒤 1966년 민주당의 아성이던 텍사스에서 하원의원에 당선돼 정치인으로 변신했다.

아들 부시 대통령은 코네티컷 주에서 태어났다. 어린 시절을 텍사스에서 보냈지만 아버지의 모교인 동부 명문고와 예일대를 졸업했다. 대학 졸업 후에는 그도 텍사스로 돌아가 석유사업을 했고, 텍사스 프로야구 구단주가 됨으로써 정치적 기반을 마련한다.

텍사스 A&M대에는 1997년 아버지 부시 전 대통령을 기념하는 기념관과 부시 스쿨(행정대학원)이 설립돼 ‘부시주의(Bushism)’ 전파를 선도하고 있다. 부시 스쿨은 7년밖에 안됐지만 급성장을 거듭하고 있다. 부시 전 대통령이 수시로 강단에 서고, 미하일 고르바초프 전 소련 대통령, 장쩌민(江澤民) 전 중국 국가주석, 헬무트 콜 전 독일 총리 등이 줄줄이 이 학교를 찾았다. 딕 체니 부통령을 비롯한 부시 행정부의 전현직 실세들의 발걸음도 끊이지 않는다.

오스틴=김승련 특파원 srkim@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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