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크 시각]‘솔선 인하’해줘서 고맙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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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1년 6월 27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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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경준 산업부 차장
정경준 산업부 차장
“상반기에 유가나 통신요금 등을 솔선해 인하해줘서 국민을 대신해 감사드립니다.”

24일 박재완 기획재정부 장관이 허창수 전국경제인연합회 회장 등 경제5단체장과의 상견례에서 한 덕담이다. 박 장관의 발언은 씹어볼수록 찜찜하다. 가격 인하를 체감하는 국민이 얼마나 될지 의문인 데다 기름값과 통신요금을 기업들이 ‘솔선해서’ 내린 적은 더더욱 없기 때문이다. 허 회장도 “국가의 장래를 걱정하며 정책결정을 하는지 의문”이라고 정색을 하고 맞받았다.

기름값 인하는 정부의 무리한 개입과 복잡한 유통구조가 얽혀 난장판이 됐다. 이명박 대통령이 “기름값이 묘하다”고 한마디하자 지식경제부가 바빠졌다. 수시로 정유회사 관계자들을 불렀고 공인회계사 자격증이 있는 최중경 장관은 “직접 원가를 계산해보겠다”고 으름장을 놓았다. 결국 SK이노베이션, GS칼텍스, 에쓰오일, 현대오일뱅크 등 정유 4사는 휘발유와 경유의 주유소 공급가격을 4월 7일부터 석 달간 한시적으로 L당 100원 내렸다.

하지만 주유소를 찾은 소비자들은 혼란에 빠졌다. 정유회사들의 할인 방식이 달랐고, 주유소는 주유소대로 정유회사 직영점과 자영(自營)점이 제각각이었다. 재고를 다 팔 때까지는 종전 값을 받아야 한다고 버틴 곳도 많았다. 일부 언론과 시민단체는 이런 사정을 무시하고 정유회사들이 약속을 지키지 않는다고 비난했다.

정유회사들은 석 달간의 기름값 인하로 총 7000억∼8000억 원의 손실을 봐야 했지만 물건 값 깎아주고 뺨 맞은 격이 됐다. 주주들을 대할 낯도 안 선다. 외국인 지분이 45%가 넘는 에쓰오일의 관계자는 “주식회사의 경영진이 주주가치를 훼손하는 일을 하는 건 엄밀히 말하면 배임(背任)”이라며 말을 흐렸다.

말도 많고 탈도 많았던 한시적 기름값 인하가 다음 달 6일 밤 12시로 끝난다. 일선 주유소들은 조금이라도 쌀 때 기름을 비축하려고 사재기에 나서 벌써 공급물량이 달린다. ‘싼 기름값’을 실감하지 못했던 소비자들은 원상으로 돌아가면 아우성칠 게 분명하다. 그러자 정부는 기름값 연착륙을 위한 방편으로 정유회사들에 단계적 인상을 ‘권고’해 다시 시장에 개입했다.

이 대통령의 대선 공약이었던 통신요금 인하도 방송통신위원회와 재정부, 공정거래위원회 등이 올해 3월 태스크포스(TF)를 만들어 추진했다. 그 결과가 이달 2일 발표된 ‘통신요금 부담 경감 정책방안’이다. TF는 1위 통신사업자라는 죄로 통신요금 인가를 받아야 하는 SK텔레콤을 다그쳐 원안을 만들었고, 여기에 여당까지 나서 ‘기본요금 월 1000원 할인’을 추가했다. 2, 3위 사업자인 KT와 LG유플러스도 연간 수천억 원의 손실을 감수하면서 생색도 나지 않는 이 행렬에 동참하지 않으면 뒷감당이 안 된다며 울상이다.

시장은 인류에게 알려진 가장 효과적인 제도다. 물론 시장이 실패해 정부가 개입할 여지가 생길 수도 있다. 그러나 정부가 잘못 끼어들거나 자주 끼어들면 ‘정부실패’를 낳고 가격 메커니즘과 시장은 파괴되고 만다. 더 좋지 않은 사실은 한 번 파괴된 시장경제는 쉽게 복구할 수 없다는 것이다.

정경준 산업부 차장 news91@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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