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횡설수설]김순덕/'삼팔선'

  • 입력 2003년 11월 3일 18시 29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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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보니 오륙도는 물론 사오정도 행복했다. 엊그제만 해도 직장인들은 45세면 정년, 56세까지 있으면 도둑이라며 씁쓸히 웃었는데 이젠 ‘삼팔선’(38세도 선선히 퇴직을 받아들인다)의 시대란다. 구조조정 칼바람이 불고 있는 증권가에는 ‘30대 명예퇴직’ 현상이 두드러진다. 노동부 조사에 따르면 지난해 임금 근로자 1000명 중 정년을 채운 사람이 4명뿐이라니, 직장에서 정년을 맞는 건 최고경영자(CEO)가 되는 것만큼이나 대단한 일로 여겨지게 됐다. 회사에서 조직개편이나 구조조정 소리만 나와도 가슴이 덜컥 하고, “요즘 왜 이 모양이야?” 상사의 말 한마디에 잠 못 자는 ‘감원 공포증’도 생기는 추세다.

▷‘삼팔선’이 늘어나는 이유를 업계에서는 기업 인사시스템이 서구형으로 바뀐 까닭이라고 풀이한다. 과거 구조조정 대상은 주로 나이 많은 직원이었다. 이젠 계량화된 인사고과가 기준이다. 나이와 상관없이 성과가 냉정하게 평가되는 ‘계급 정년’이 도입됐다. 젊은 직장인들은 온 나라가 들썩대는 대학입시 통과하고, 역시 온 나라가 걱정해 준 청년실업까지 뚫고 어렵게 취업했더니, 책상 배정받자마자 조기퇴직을 걱정할 판이다. 그래도 ‘삼팔선’이 충격과 공포로만 다가오는 것은 아니다. 한 살이라도 젊을 때, 회사가 위로금이라도 더 줄 때 최대한 받아서 두 번째 삶을 펼치는 게 낫다고 여기는 이도 적지 않다.

▷‘삼팔선’이 우리나라만의 현상이라고 할 수는 없다. 평생직장이란 개념은 세계적으로 멸종 단계다. 세계화와 테크놀로지의 변화 등으로 인한 구조적 변화 때문이다. 세계의 생산공장은 인건비 싸고 기업하기 좋은 곳으로 국경을 불문하고 움직인다. 컴퓨터와 인터넷은 과거 사람이 하던 일을 획기적으로 발전시켰다. 기술혁신으로 생산성이 높아질수록 노동인력은 덜 필요하다. 경기가 좋아진대도 실업률, 특히 제조분야의 실업률이 줄어드는 건 기대하기 어렵게 됐다. 성장 업종에서 억대 연봉을 받는 핵심인력 지식노동자가 증가하는 것만큼 사양 직종 저숙련 저임금 노동자의 살림은 갈수록 팍팍해지게 생겼다. 노동시장도 양극화 체제다.

▷‘인간자본의 부익부 빈익빈’은 머리띠 두르고 거리로 나선다고 해결되지 않는다. 노조 무서워 기업 못 하겠다며 공장 문을 닫으면 모두 손해다. 지나치게 유연해진 노동시장의 문제는 우선 각자 자신을 ‘브랜드화’함으로써 대처하는 수밖에 없다. 끊임없는 재교육과 네트워킹으로 언제든 새 일을 찾아 떠날 수 있게 대비하는 거다. 정부가 ‘기업하기 좋은 나라’를 만들어 줄 것을 속으로 간절히 바라면서.

김순덕 논설위원 yuri@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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