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간특집84/GDP 1조달러 국가로]<2>생산성은 제자리

  • 입력 2004년 4월 1일 18시 49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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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동차산업 전문가인 김기찬(金基燦) 가톨릭대 경영학과 교수는 작년 말 일본 아이치(愛知)현 도요타(豊田)시에 있는 도요타자동차 공장을 방문했을 때 받은 인상을 잊지 못한다.

김 교수가 공장을 둘러보던 몇 시간 동안 빈둥거리는 근로자를 찾아보기 힘들었다. 구슬땀을 흘리며 일하거나 제작 중인 차량을 쳐다보며 골똘히 생각에 잠긴 근로자만 눈에 들어왔다. 작업하다가 생긴 문제의 해결책을 즉석에서 찾기 위해 삼삼오오 모여 열띤 토론을 벌이기도 했다.

한 근로자에게 출퇴근 시간을 물었다. “몇 시간을 일하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해결하지 못한 문제가 있으면 밤을 새울 수도 있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관련기사▼

- <1>實事求是의 시대
- <3>정부규제의 폐해
- <4>反기업정서의 덫
- <5>서비스업 후진국

김 교수는 “현대자동차 직원들이 2002년 기준으로 1인당 평균 34대를 만드는 동안 도요타 근로자들은 53대씩 생산했다”며 “도요타의 높은 생산성은 직원들의 열정과 시스템에서 나온다는 걸 새삼 깨달았다”고 말했다.》

‘저(低)생산성의 벽.’ 한국이 국내총생산(GDP) 1조달러대의 국가로 가기 위해 반드시 넘어서야 하는 장애물이다. 쉬운 일은 아니다. 하지만 100의 노력을 들여 100, 또는 그 이하밖에 만들 수 없는 경제 체질을, 200을 만들어내는 경제로 바꿀 수만 있다면 GDP 1조달러 국가는 한층 가까워진다.

▽경제 발목 잡는 낮은 생산성=한국은행 금융경제연구원의 하준경(河駿坰) 연구원은 얼마 전 국가별 생산성을 비교하는 연구를 하던 중 깜짝 놀랄 만한 결론에 도달했다.

전혀 예상하지 못한 바는 아니지만 한국의 전체 생산성은 홍콩이나 싱가포르의 60% 수준에 불과한 것으로 나타났다. 미국과 비교하면 50%에 불과했다. 똑같은 돈과 노동력을 들여서 절반 정도밖에 생산하지 못하는 셈이다.

똑같은 자본과 노동을 투자해도 생산품의 양과 질이 상대적으로 떨어지는 저생산성 문제는 한국이 국내총생산(GDP) 1조달러 나라가 되기 위해 꼭 해결해야 할 과제다. 직원들의 열정과 경영진의 리더십으로 높은 생산성을 이뤄낸 일본 도요타 자동차 공장에서 근로자들이 작업에 열중하고 있다. -동아일보 자료사진

하 연구원은 “한국의 기업들은 기술모방과 외형 늘리기 전략에서 기술혁신 전략으로 전환하지 못하면서 ‘저생산성의 함정’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고 분석했다.

생산성이 낮은 기업이 높은 경쟁력을 갖출 수는 없다. LG경제연구원이 1990년 이후 노동생산성과 노동비용이 각각 얼마나 증가했는지를 토대로 분석한 결과 한국 제조업의 ‘경쟁력 지수’는 대만의 5분의 1, 일본의 2분의 1 수준에 불과했다. 노동비용은 급증하지만 노동생산성은 이를 쫓아가지 못하면서 경쟁력 저하로 이어진다는 뜻이다.

노벨경제학상 수상자인 조지프 스티글리츠 미 컬럼비아대 교수는 최근 미국 뉴욕의 코리아소사이어티 초청 강연에서 “한국이 노동생산성만 높일 수 있어도 외환위기 이전의 고성장을 회복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무엇이 생산성을 떨어뜨리는가=서길석(徐吉錫) 우리은행 재무팀장은 요즘 은행의 생산성을 어떻게 끌어올릴지 고민하고 있다. 서 팀장이 분석한 결과 국내 은행들의 지난해 총자산수익률(ROA)은 1%에도 미치지 못했다. 씨티은행, HSBC 등 외국 은행들의 ROA는 매년 1.5%를 웃돈다. 100조원의 돈을 굴릴 때 국내 은행들은 1조원의 이익을 내기에도 벅찬 반면 외국계 은행들은 1조5000억원을 넘게 벌어들이는 셈이다.

기업의 생산성을 떨어뜨리는 요인은 복합적이다. 저조한 기술혁신과 부족한 원천(源泉)기술, 비효율적인 인력 운용, 높은 임금과 땅값, 잦은 파업과 냉소적이고 안이한 근로의식 등 곳곳에서 발견된다.

현대자동차 산하 한국자동차산업연구소의 유기천(柳基天) 차장은 “인력을 재배치하거나 라인 가동 속도를 조절해 인력 활용을 극대화해야 생산성을 올릴 수 있지만 노조의 동의를 일일이 받아야 하는 현 상황에서는 쉽지 않다”고 털어놓았다.

▽기술혁신과 유연한 사고=전문가들은 생산성을 높이기 위해서는 생산성이 높은 인력을 배출하는 교육시스템과 기술혁신을 통한 원천기술 확보가 시급하다고 입을 모은다.

한국생산성본부 생산성혁신센터의 이근희(李謹熙) 연구원은 “생산성 향상을 단순히 ‘비용 절감’으로만 이해하는 기업들이 많다”며 “비용 절감을 통한 생산성 향상은 한계가 있고 기술혁신을 통해 ‘생산성 점프’를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원천기술을 확보하기 위한 연구개발(R&D)에도 선택과 집중이 필요하다. 미국계 컨설팅업체인 모니터컴퍼니의 송기홍(宋基弘) 부사장은 “한국 기업의 R&D 조직은 수십개의 프로젝트를 동시에 진행하면서 결과물은 제대로 내놓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며 “외국의 선진기업들처럼 우선순위가 높은 4, 5개 프로젝트를 선정해 역량을 집중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박광태(朴光太) 고려대 경영학과 교수는 “국내 기업들은 회사 내의 각종 정보를 효율적으로 관리하고 활용하는 능력이 떨어진다”며 “사내 지식을 활용하는 지식경영에 힘을 기울여 정보를 적극적으로 공유하려는 노력을 펼치는 것도 생산성 향상의 한 방법”이라고 말했다.

▼외국기업과 경쟁해야 살아남는다▼

한국이 ‘1조달러 국가’로 도약하려면 반드시 해결해야 할 과제가 하나 있다. 미국 일본 등 선진국에 비해 현저히 낮은 생산성을 높이는 것이다.

현재 한국 기업의 생산성은 미국 기업에 비해 턱없이 떨어진다. 미국 기업의 생산성을 100으로 봤을 때 한국의 제조업은 65%, 서비스업은 45% 수준이다. 같은 노력을 들이고도 성과는 2분의 1∼3분의 2밖에 안 된다는 뜻이다.

이 때문에 한국 기업들이 생산성을 높이지 못하면 선진국 기업들을 따라잡기는커녕 차이가 더 벌어질 것이라는 우려가 커지고 있다. 특히 금융, 의료, 법률, 공공서비스 분야 등을 포함하고 있는 서비스업은 제조업에 비해 상대적으로 생산성이 낮다는 점에서 혁신이 필요하다는 의견이 많다.

그렇다면 서비스업 생산성을 높이기 위한 방법으로는 무엇이 있을까.

우선 전략적인 외국인 투자 유치가 필요하다. 전근대적인 경영 기법을 고수하고 있는 국내 서비스업 기업들이 변신하기 위해서는 고객 지향적이고 효율적인 외국 기업을 국내에 유치해 자극을 줘야 한다. 간단하게 말하면 경쟁원리를 도입해야 한다.

제조업체도 마찬가지다. 서비스업체에 비해 상대적으로 생산성이 높다는 평가를 받지만 그것도 대기업에만 해당된다. 대기업에 납품하는 협력업체들의 생산성은 생각보다 높지 않다. 국산차가 “새 차는 좋지만 몇 년 지나면 내구성이 떨어진다”는 평가를 받는 것도 이 같은 이유에서다.

따라서 ‘완성품’을 만드는 대기업과 ‘부품’을 만드는 중소기업간의 차이를 좁힐 수 있는 특별한 대책이 필요하다. 재교육이 가능한 대기업보다는 신입사원을 바로 활용해야 하는 중소기업을 위해 일선 학교에서 실용적인 교육을 해야 한다.

서중해 한국개발연구원(KDI) 연구위원

▼글로벌기업의 생산성혁신▼

세계시장에서 경쟁력을 갖고 있는 주요 글로벌기업에서는 생산성 혁명이 한창이다. 생산성을 높이기 위해서는 생산방식 변경과 구조조정 등 수단을 가리지 않는다.

특히 일본 캐논은 ‘낭비 제거’와 ‘개선(改善)’을 골자로 하는 도요타 시스템을 받아들여 생산성 혁신을 이룬 사례다.

캐논이 1개 생산라인에서 5개의 차종이 나오는 도요타의 멀티 생산시스템을 응용한 시스템을 도입한 것은 1999년. 낭비를 없애기 위해서는 주문형 생산체제로 전환해야 한다고 보고 컨베이어 라인을 없앴다. 대신 개별 노동자가 일괄적으로 부품을 조립하는 셀(Cell) 제조방식으로 바꿨다. 캐논은 일본에 이어 한국 등 다른 해외사업장에도 확대 적용하면서 매년 순이익 규모를 늘려가고 있다.

네덜란드 필립스가 1990년 시도했던 구조조정 프로그램인 ‘센트리온’도 모범 사례로 꼽힌다. 당시 필립스는 세계적인 경기 둔화로 주력사업인 가전부문과 신규사업이었던 유통부문에서 투자손실로 19억유로의 손실을 기록하며 위기에 처했다.

최고경영자(CEO)였던 얀 티머는 ‘본업’에 주력하기로 결심했다. 이를 위해 필립스가 갖고 있던 일본 마쓰시타정공, 미국 대형 유통업체 슈퍼클럽과 중저가 가전업체 매그너박스 주식을 모두 매각해 자산 규모를 축소했다.

이에 따라 90년 215억유로였던 자산은 93년 175억유로로 20%가량 줄었다. 하지만 같은 기간 수익률은 크게 좋아졌다. 수익성 개선에 성공한 필립스는 95년부터 핵심사업에 투자를 늘리는 등 생산성을 올리는 작업에 들어갈 수 있었다.

만성 적자에 허덕이던 일본 닛산자동차는 유능한 외국계 CEO를 영입한 뒤 과감한 구조조정을 통해 생산성 향상을 이뤄냈다.

프랑스 르노자동차가 닛산을 인수한 뒤 99년 사장으로 부임한 르노 출신의 카를로스 곤은 5개 공장을 폐쇄하고 2만1000명의 인원을 줄여 생산비용을 낮췄다. 또 본사 사옥 매각, 계열사 양도

, 은행 상호 보유주 처분 등을 통한 자금조달에도 나섰다. 이런 노력이 효과를 거두면서 2조1000억엔의 부채와 연간 1000억엔의 이자부담에 시달리던 닛산은 2002회계연도(2002년 4월∼2003년 3월)에 매출 6조8500억엔, 순이익 4950억엔의 실적을 올렸다.

▼특별취재팀▼

권순활 경제부 차장(팀장)

신치영 차지완 송진흡 공종식

고기정 김창원 기자(경제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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