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경제 싱크탱크]<7>금융연구원

  • 입력 2003년 7월 22일 18시 15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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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금융연구원은 소신 있는 연구와 발표로 금융 분야에서 독보적인 연구소의 입지를 굳혀 왔다. 왼쪽부터 서근우 비은행금융팀장, 박재하 거시금융팀장, 김병연 선임연구위원, 최흥식 부원장, 정해왕 원장, 손상호 선임연구위원, 이장영 선임연구위원, 차백인 연구조정실장, 박해식 국제금융팀장, 이재연 은행팀장. 권주훈기자
한국금융연구원은 소신 있는 연구와 발표로 금융 분야에서 독보적인 연구소의 입지를 굳혀 왔다. 왼쪽부터 서근우 비은행금융팀장, 박재하 거시금융팀장, 김병연 선임연구위원, 최흥식 부원장, 정해왕 원장, 손상호 선임연구위원, 이장영 선임연구위원, 차백인 연구조정실장, 박해식 국제금융팀장, 이재연 은행팀장. 권주훈기자

한국이 국제통화기금(IMF)으로부터 구제금융을 받기 9개월 전인 1997년 3월 하순 한국금융연구원 연구위원들은 재정경제원(현 재정경제부)으로부터 거센 항의를 받았다.

‘외환위기 가능성이 커지고 있다’는 보고서가 언론에 보도된 것이 발단이었다.

금융연구원은 보고서에서 “한국의 전반적인 국가위험도가 높아져 경제가 심각한 위기를 맞을 우려가 있다”고 지적했다.

강경식(姜慶植) 당시 경제부총리는 “외환위기는 있을 수 없다”며 언론사에 기사를 뺄 것을 요청했고 금융연구원에는 “근거 없이 위기의식을 조장하는 보고서를 작성했다”며 호통을 쳤다.

그러나 9개월 뒤 외환위기는 현실로 드러났고 보고서는 강 부총리 등 김영삼(金泳三) 정부 경제팀이 ‘민간연구소의 외환위기 가능성 경고를 무시해 외환위기에 대비하지 않았다’는 책임론을 뒷받침하는 근거가 됐다.

이 사건은 금융시장의 커다란 흐름을 미리 읽어내며, 국책연구원과는 달리 정부의 눈치를 살피지 않고 제 목소리를 내온 금융연구원의 성격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금융연구원의 역사는 한국 금융산업 발전사의 축소판=전국은행연합회 산하의 소규모 금융경제연구소를 금융연구원으로 확대 개편한다는 것은 89년 이규성(李揆成) 당시 재무부 장관의 아이디어였다.

재무부에도 경제기획원 산하의 한국개발연구원(KDI)처럼 금융을 전문적으로 연구하는 기관이 있어야 한다는 생각에서였다.

그러나 이 장관은 89년 12·12 증시부양조치에 대한 책임을 지고 물러났고 금융연구원은 우여곡절 끝에 91년 4월 은행이 기금을 출연해 민간연구원으로 설립됐다.

이후 금융연구원은 굵직굵직한 사안에 대해 한발짝 앞서 화두를 던지고 대안을 제시하며 금융산업의 발전을 주도했다.

91년 6개월간의 연구 끝에 정부에 금리자유화의 청사진을 제공한 것은 금융연구원의 첫 작품이었다. 재무부가 일일이 정해주던 예금 및 대출 금리를 자유화하는 것이 관치금융의 폐단을 막는 첫걸음이라는 것이 금융연구원의 판단이었다.

97년 말 외환위기 이후에는 청와대 재경부 금융감독원 관계자들과 팀을 이뤄 기업 금융구조조정의 틀을 만들었다. 금융기관 주도로 기업구조조정을 추진하는 기업개선작업(워크아웃) 개념도 금융연구원이 처음 도입했다.

금융연구원 설립 멤버인 최장봉(崔長鳳) 선임연구위원은 “연구원이 5년만 더 일찍 설립돼 금융계가 안고 있는 문제점에 대한 해결책을 제시했어도 지금 한국 금융산업의 모습은 많이 달라졌을 것”이라고 말했다.

▽‘맞춤형’ 보고서는 만들지 않는다=금융연구원은 정부의 파트너로 금융정책 대안을 제시하는 데 연구의 초점을 맞추고 있지만 KDI, 조세연구원 등과 같은 국책연구소가 아니다. 민간 자금으로 설립됐고 운영된다. 그런 점에서 금융연구원 사람들은 스스로 ‘반관반민(半官半民)’ 연구소라고 부르기도 한다.

그래서인지 ‘정부 입맛에 맞춘 보고서를 만들지는 않는다’는 원칙을 갖고 있다. 정부가 펄쩍 뛸 것을 예상하면서도 할 말은 한다는 자부심을 지녔다.

정해왕(丁海旺) 금융연구원 원장은 “간혹 정부 부처에서 보고서 초안을 만들어서 발표만 해달라고 요구할 때도 있다”며 “이럴 때는 연구원 자체 보고서를 만들어 복수안으로 발표한다”고 귀띔했다.

소신 있는 연구의 대표적인 사례가 생명보험사 상장 차익을 계약자에게 돌려줘야 한다는 보고서를 만들었던 일.

생보사 상장시 차익을 계약자에게 돌려줘야 하느냐는 문제를 놓고 삼성생명과 시민단체들이 첨예하게 맞섰던 99년 8월. 금융연구원은 금융감독위원회가 용역을 의뢰한 보고서를 발표하면서 “생보사는 주식회사로 설립됐지만 계약자에게 유배당 상품을 판매하는 상호회사 성격으로 운영돼 왔다”며 계약자 배당을 주장했다.

당시 보고서 작성을 주도했던 최흥식(崔興植) 금융연구원 부원장의 회고.

“나중에 금감위와 금감원 관계자들이 ‘그렇게 계약자 배당을 세게 밀어붙이는 보고서를 발표하면 어떡하느냐’며 곤란해 하더군요.”

▽연구원을 이끄는 사람들=금융연구원의 연구직 인력은 원장을 포함해 33명. 은행팀, 비은행금융팀, 거시금융팀, 국제금융팀 등 4개 팀을 이루고 있다.

사령탑을 맡고 있는 정 원장은 대신경제연구소 대표를 지낸 뒤 93년 7월 초대 부원장으로 부임하고 98년 3대 원장에 취임한 금융연구원의 산증인. 전임 원장들과 달리 연구위원들에게 소신 있는 주장을 펴도록 독려해 연구위원의 언론 인터뷰나 기고 등이 부쩍 늘었다.

최 부원장은 연구원에서 유일하게 프랑스에서 경영학 박사학위를 받은 인물이다. 외부용역이 있을 때 팀을 만드는 연구조정 업무를 총괄하고 있어 연구위원들의 연구 현황을 손바닥 보듯 들여다보고 있다.

차백인(車白仁) 연구조정실장은 국제금융 전문가로 홍콩시립대에서 재무학과 교수로 지내던 중 98년 금융연구원으로 자리를 옮겼다. 특히 중국 금융산업에 대해 탁월한 식견을 갖고 있다.

이재연(李載演) 은행팀장은 소매금융과 예금보험 분야의 전문가로 연구위원들의 애로사항에 대해 거침없이 의견을 내는 소신파다. 맡은 일을 깔끔하게 처리한다는 평판을 듣는다.

서근우(徐槿宇) 비은행금융팀장은 금감위 기업구조조정기획단 총괄심의관을 지내면서 외환위기 이후 기업구조조정을 주도한 주인공이다. 요즘은 벤처금융체제 정비방안과 신용보증제도에 대한 연구에 공을 들이고 있다.

박재하(朴在夏) 거시금융팀장은 연구원 최고참으로 금리자유화와 외환제도 개편 등 금융규제 개혁 작업을 주도해 왔다. 하루 1만보를 걸으면 건강을 유지할 수 있다는 생각에 틈나는 대로 걸으며 건강관리를 한다.

박해식(朴海植) 국제금융팀장은 일본에서 고등학교를, 미국에서 대학을 나온 특이한 경력의 소유자다. 외환 및 파생상품 전문가이며 최근에는 동북아 금융중심 구축 방안을 연구하고 있다.

최 선임연구위원은 금융연구원 조세연구원 예금보험공사 등을 옮겨 다니며 설립 멤버로 활동해 ‘금융계의 건축가’로 통한다. 금감원 부원장보를 거쳐 2001년 4월 금융연구원에 복귀했다. 예금보험과 금융감독의 전문가로 일처리가 꼼꼼하다.

최공필(崔公弼) 선임연구위원은 대우경제연구소를 거쳐 94년 8월 금융연구원으로 옮긴 뒤 거시경제 예측 분야만 줄곧 연구해온 거시경제 전문가. 소신 발언을 잘하기로 정평이 나 있다. 지난해엔 가계부채 문제의 위험성을 집중 거론해 주목을 끌었다.

이장영(李長榮) 선임연구위원은 뉴욕주립대 경제학과 교수를 지내다 대외경제정책연구원(KIEP)과 조세연구원을 거쳐 IMF에 3년 근무한 국제통. IMF와 정부 사이의 다리 역할을 한 덕분에 외환위기 때 가장 바쁜 사람 중 한 명이었다.

손상호(孫祥皓) 선임연구위원은 산업연구원 산업금융팀장으로 일하다 95년 금융연구원으로 옮겨 금융정책, 리스크관리 등을 연구했다. 은행위기 조기경보시스템을 개발했다.

강종만(姜鍾萬) 선임연구위원은 한국개발리스, 대우실업, 새한종금, 증권연구원 등을 거친 다양한 경력의 소유자. 증권시장제도 분야에서 독보적이다.

김병연(金炳淵) 선임연구위원은 연구원 초창기 멤버로 92년 2월부터 11년이 넘도록 연구원을 떠나 외도를 한 적이 없다. 본인은 ‘능력이 없어서’라고 겸손해 하지만 은행경영전략 분야의 내로라하는 전문가다.

신치영기자 higgledy@donga.com

▼금융-조세硏 91년 함께 설립… 연구위원 교류 잦아▼

한국금융연구원이 한국조세연구원과 인연이 깊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금융을 연구하는 금융연구원이 세금을 연구하는 조세연구원과 무슨 인연이 있는 것일까.

금융연구원 설립을 처음 구상한 이규성(李揆成) 전 재무부 장관은 사실 지금의 금융연구원과 조세연구원을 합친 ‘조세금융연구원’을 만든다는 계획이었다.

경제기획원 산하의 한국개발연구원(KDI)에 버금가는 연구원을 만들려면 재무부 업무인 금융과 세제에 대한 연구기능을 묶어야 한다는 판단이었다.

이 전 장관은 1989년 당시 노태우(盧泰愚) 대통령의 재가를 얻어 조세금융연구원 설립을 공식화했고 금융기관 출연금으로 연구원을 세운다는 계획을 추진하던 중 12·12 증시부양조치로 경질됐다.

1년 넘게 조세금융연구원 설립 작업이 중단되자 재무부 금융정책국은 일단 조세 분야를 떼어낸 금융연구원을 만들기로 했다.

결국 금융연구원은 91년 4월 민간연구소로 설립됐고 이듬해 9월 조세연구원은 특별법에 따른 국책연구소로 출범했다.

금융연구원 관계자들은 이때까지만 해도 두 연구소가 합쳐질 것으로 예상했지만 설립 이후 두 연구소는 각자의 길을 걸었다.

조세연구원과의 각별한 인연 때문인지 금융연구원에는 조세연구원 출신 연구위원들이 많다.

최흥식(崔興植) 부원장은 현대경제사회연구원의 연구위원으로 87년 3월부터 92년 7월까지 5년 넘게 근무한 뒤 조세연구원에서 92년 8월부터 99년 1월까지 근무하다 99년 1월 금융연구원으로 자리를 옮겼다.

최장봉(崔長鳳) 선임연구위원은 설립 멤버로 금융연구원에서 일하다 92년 조세연구원으로 옮겨 4년 동안 일했고 예금보험공사 조사부장과 금융감독원 부원장보를 거쳐 2001년 4월 금융연구원으로 복귀했다.

이장영(李長榮) 선임연구위원과 박종규(朴宗奎) 연구위원도 조세연구원에서 일한 경력이 있다.

신치영기자 higgledy@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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