응급피임약 ‘처방후 구입’ 현행 유지 … 꼭 필요한 ‘불편함’

  • 입력 2016년 5월 23일 17시 56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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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임, 여성만의 책임 아냐 … 응급피임약 자유로운 복용 앞서 인식개선·의사책임감 중요
성관계 후 피치 못할 ‘사고’로 찾는 응급피임약은 결국 지금처럼 의사의 처방이 있어야만 구입할 수 있게 됐다. 식품의약품안전처와 한국의약품안전관리원이 지난 3년간 전국 15~59세 남녀 6500명을 대상으로 피임약 사용 실태·부작용·인식도 등을 종합 검토한 결과 응급피임약 분류를 의사의 처방이 필요한 ‘전문의약품’으로 유지하기로 했다고 지난 20일 밝혔다. 미리 복용하는 일반 피임약은 약국에서 구매하는 ‘일반의약품’ 분류를 유지했다. 식약처가 응급피임약을 계속 전문의약품으로 두는 것은 ‘오남용 우려가 크다’고 결론지었기 때문이다.

식약처는 2012년 전체 의약품 재분류 작업을 벌이던 당시 ‘응급피임약을 처방전 없이 살 수 있는 일반의약품으로 재분류해야 한다’는 주장이 나오자 피임약 재분류의 타당성을 검토하기 위해 이같은 실태 조사를 벌였다.

응급피임약은 고용량 프로게스테론을 집중 투여, 수정란이 자궁내막에 착상하는 것을 막아 임신을 피한다. 아무 때나 먹는다고 피임이 보장되는 것은 아니고 의심되는 성관계 후 72시간 안에 복용해야 약효를 볼 수 있다. 수정란은 수정 후 72시간 이내에 자궁에 착상하는 만큼 일찍 먹을수록 성공확률도 높다. 24시간 안에 먹었다면 95%, 48시간 이내는 85%, 72시간 이내에는 58%로 점점 낮아진다.

응급피임약 생산·수입액은 2013년 28억원, 2014년 43억원, 2015년 42억원으로 증가세를 보이고 있지만 식약처 조사 결과 약물에 대한 부작용 등을 제대로 파악하고 있는 여성은 44%에 불과했다. 특히 여성 청소년은 이 비율이 36%로 더 낮았다. 실제로 응급피임약에 관한 정보는 대개 주변사람(40.7%)으로부터 얻는 것으로 나타났다. 의사 등 ‘전문가’를 찾는 사람은 18%에 그쳐 오남용 우려가 큰 것으로 조사됐다.

또 여러 번 먹을수록 효과가 떨어지므로 남용해서는 안 되지만 의사조차 이를 간과하는 경우도 적잖았다. 김상봉 식약처 의약품정책과장은 “응급피임제는 1개월 내에 다시 먹으면 생리 주기에 심각한 장애를 유발할 수 있는데도 재처방률이 3%에 달해 오남용 우려가 있다”며 “이런 우려와 피임제에 대한 국내의 인식 부족 등을 고려한 결정”이라고 설명했다.

김태준 호산여성병원 산부인과 원장은 “사후피임약은 워낙 고용량이라 일반 경구피임약 20알을 한꺼번에 먹는 것과 같다”며 “일반 피임약에는 프로게스테론 역할을 하는 레보노르게스트렐(Levonorgestrel), 게스토덴(Gestoden), 데소게스트렐(Desogestrel) 중 하나가 0.075~0.15㎎ 들어있지만 사후피임약엔 레보노르게스트렐이 피임약의 10~20배인 1.5㎎이나 함유돼 있어 그야말로 ‘호르몬 폭탄’을 체내로 투하하는 셈”이라고 설명했다.

이어 “사후피임약은 여성에게 출산만큼 큰 충격을 주는 만큼 주의해서 사용해야 한다”며 “한 월경 주기 안에는 2회 복용하는 것도 안 되는데, 이를 피임약처럼 자주 사용하면 두통·오심·자궁출혈·생리불순 등 부작용을 피하기 어렵다”고 강조했다.

하지만 이번 조치에 소비자단체와 시민단체 등은 다소 ‘아쉽다’는 반응이다. 이들은 “현행 제도가 소비자 불편만 초래한다”며 비판하고 나섰다.

대학가나 번화가 근처의 산부인과의 월요일 아침은 응급피임약을 처방받으려는 여성들이 몰린다. 주말에 전전긍긍하다가 아침부터 병원 문을 두드리게 된다.

일부 병의원은 ‘사후피임약 처방하는 약국’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월요일 아침 젊은 여성이 병원 문을 열고 들어오면 으레 ‘사후피임약 처방 받으시겠어요?’ 같은 말을 던진다. 이후 원장과 1분 남짓한 진료가 끝나면 처방전이 발급되고 환자는 주변 약국에서 약을 복용하면 그만이다. 시민단체 등은 “제대로 진료하지 않을 거면 약국에서 사는 것과 다를 바가 없지 않느냐”며 “응급피임약 처방 비용은 비급여이어서 병원마다 천차만별”이라고 지적하고 있다.

양호교사 유모 씨(29·여)는 “임신에 대한 두려움은 오롯이 여성 혼자의 몫”이라며 “성관계는 둘이 즐기고, 남자친구들은 임신 문제에서 방관자가 되는 경우가 다수이며, 결국 임신으로 사회의 지탄을 받는 것은 여자”라고 말했다. 이어 “내 몸을 스스로 보호하기 위해 약을 편리하게 복용할 수 있는 시스템이 만들어지길 바란다”고 말했다.

시민단체가 주장하는 논리 중 하나는 서구 선진국도 응급약을 일반약으로 분류하는 실정에서 한국은 왜 ‘굳이’ 처방받아야만 약을 살 수 있느냐는 것이다. 국내와 달리 미국·유럽 등에서는 응급피임약이 대개 일반약으로 분류돼 있다. 약국에서 쉽게 구입할 수 있어 ‘모닝 필’(morning pill)로 불린다. 영국의 경우 16세 이상은 처방전 없이, 16세 미만은 처방전이 필요한 약으로 구분하고 있다.

하지만 김태준 원장은 이같은 차이는 한국과 미국·유럽 등의 ‘의료기관 접근성’에서 비롯된다고 강조했다. 그는 “한국의 경우 서구권에 비해 병원 접근성이 높아 처방이 수월한 편”이라며 “특히 사고는 야간에 발생하기 마련인데 밤에는 어느 나라든 약국이 문을 닫는 데다 국내서는 야간분만 등으로 외국과 달리 늦게까지 운영하는 산부인과가 적잖아 급한 처방이 요구될 때에는 오히려 한국이 편리한 조건”이라고 설명했다.

그는 응급피임약은 고용량 호르몬제제인 만큼 의사의 관리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김 원장은 “가령 응급피임약이 일반약이 됐을 때 겪는 부작용은 개인의 문제로 여겨질 가능성이 높지만 병원에서 처방받은 뒤라면 이후 일어난 책임은 의사가 지므로 환자의 안전 측면에서도 전문약으로 분류되는 게 맞다”는 입장을 밝혔다.

임신 가능성을 우려해 찾아온 환자에게 일부 병의원은 대충 처방하고 끝내는 경우도 있지만 대다수는 환자의 생리주기, 사고가 났을 때의 상황, 초음파를 통한 배란 여부 등을 확인하고 고용량의 호르몬제를 굳이 처방하지 않는 경우도 많다. 이와 함께 피임·성병예방 관련 지식을 알려주는 등 전문적인 케어를 해준다.

김 원장은 ‘피임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서구권의 경우 콘돔·일반피임약·루프 등을 활용한 피임률이 높은 편이지만 국내서는 그렇지 못한 게 사실이라고 지적했다. 그는 “유럽이나 미국에서는 아기를 원치 않는 커플은 콘돔이 없으면 관계를 절대 가지지 않는 등 피임률 자체가 높아 응급피임약을 찾는 빈도가 그리 높지 않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며 “국내서도 응급피임약을 자유로이 복용할 수 있는 제도를 형성하는 것보다 오히려 피임의 중요성에 대한 인식이 퍼지는 게 우선일 것”이라고 설명했다.

피임은 여성만의 문제가 아닌 남녀가 함께 준비하고, 고민해야 하는 문제다. 응급피임약 분류는 ‘환자의 편의성’에 기반을 둔 것이지만, 제대로 된 피임 인식이 자리잡기 전까지는 ‘꼭 필요한 불편함’의 제도화가 필요하다는 게 김 원장의 견해다. 가장 간편한 것은 콘돔 착용으로 남성은 ‘순간의 쾌락’에만 집중하고 ‘나 몰라라’ 하는 태도는 지양해야 한다.

김태준 원장은 “성인인데도 생리 중에 성관계를 맺으면 임신이 절대 되지 않는다고 생각하거나, 질외사정을 피임법이라고 믿는 등 제대로 된 피임상식을 갖추지 못한 경우가 적잖다”며 “남성 중에는 콘돔을 거부하는 게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적잖아 응급피임약의 오남용이 줄지 않는 실정”이라고 말했다.

글/취재 = 동아닷컴 라이프섹션 정희원 객원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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