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일 오후 서울 서초구 한국제약바이오협회의 AI 신약연구원에서 연구원들이 AI 기술을 이용해 실험을 진행하고 있다. 한국제약바이오협회 제공
국내 중소 제약바이오 기업 10곳 중 9곳이 신약 후보물질의 체내 흡수와 독성 등을 초기에 제대로 예측하는 데에 어려움을 겪는 것으로 나타났다. 신약 하나를 개발하는 데 보통 10∼15년과 약 3조 원이 들고, 임상시험에 들어간 후보물질의 최종 출시 비율도 10%에 못 미치는 만큼 개발 여력이 부족한 중소기업의 부담은 더 크다. 해외에서는 AI가 설계한 후보물질이 임상 단계까지 진전된 사례가 나오고 있지만, 국내에서는 AI 신약개발에 필요한 데이터와 협력 기반부터 부족한 상황이라는 지적이 나온다.
●“될 약인지 초기 판단 어렵다”
14일 본보가 입수한 중소기업기술정보진흥원 과제 결과 보고서에 따르면 국내 중소 제약바이오 기업 66곳 가운데 92%가 신약 개발 단계에서 ‘후보물질의 체내 흡수와 분해·배출, 독성을 초기에 정확히 예측하기 어렵다’고 답했다. 이는 보고서에 제시된 단계별 세부 애로사항 가운데 가장 높은 응답률이다. 이번 조사는 한국제약바이오협회 AI신약연구원이 지난해 12월부터 올해 5월까지 중소기업이 신약개발 단계별로 겪는 어려움과 필요한 AI 기술을 분석한 국내 첫 조사다.
실패 위험이 큰 신약 개발 초기에 문제를 걸러내지 못하면 장기간 연구 끝에 임상 단계에 후보가 탈락해 그동안 투입한 시간과 비용을 잃을 수 있다. 실제로 국내 바이오기업 오름테라퓨틱은 2022년 미국 임상 1상에 들어간 유방암 치료제 후보물질 ‘ORM-5029’에서 중대한 이상반응이 발생하자, 안전성과 약물동태학 자료 등을 재검토한 끝에 지난해 4월 개발을 자진 중단한 바 있다. 후보물질의 독성과 체내 움직임을 개발 초기에 정확히 가려내는 일이 중요한 이유다.
신약이 겨냥할 단백질이나 유전자를 찾고 치료 효과 가능성을 확인하는 단계에서도 응답 기업의 약 85%가 ‘반복 실험에 드는 시간과 인력, 비용을 부담’을 주요 애로사항으로 꼽았다. 중소제약바이오기업의 핵심 문제는 아이디어 부족보다 한정된 자원을 어느 후보에 투입할지 초기에 판단하기 어렵다는 점이다. 이 부분에서 AI는 방대한 논문과 실험 결과를 분석해 유망 후보를 좁히고 체내 흡수와 독성 가능성을 미리 예측할 수 있다.
●기술은 있지만 데이터·연결망 부족
그러나 AI 프로그램만 구매한다고 문제가 해결되는 것은 아니다. 정확한 예측에는 데이터가 필요하지만, 응답 기업의 55%가 ‘희귀·난치질환 환자 데이터를 확보하고 활용하기 어렵다’고 답했다. 병원과 연구기관마다 자료 형식이 다르고, 중소기업 내부에도 과거 실험 결과가 체계적으로 축적되지 않은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어떤 AI 기업이 제약바이오기업이 연구하는 질환과 개발 단계에 맞는 기술을 보유했는지 비교할 전문 매칭 체계도 부족하다. 이 때문에 응답 기업의 62%는 AI 기업과의 협업 형태로 공동 연구개발(R&D)을 가장 선호한다고 답했다. 단순 AI 프로그램 구매보다 연구 과정에서의 긴밀한 협력을 원한다는 의미다. 소규모로 기술 효과를 검증하는 파일럿 프로젝트가 17%, 기술이전·도입이 12%, 데이터 공유 협약이 9%로 뒤를 이었다. 제약사는 질환·약물 지식과 실험 역량을 제공하고, AI 기업은 데이터 분석과 예측 기술을 맡아 함께 모델을 개선하는 방식이 현실적이라는 뜻이다.
현재 정부는 AI 신약개발 플랫폼 구축, 전임상·임상 예측 모델 개발, AI 바우처 등 여러 사업을 추진하고 있다. 다만 대형 컨소시엄이나 범용 AI 솔루션 구매 지원이 중심이어서, 개별 중소 제약사가 자신의 신약 후보와 맞는 AI 기업을 찾아 소규모 검증부터 시작하기에는 한계가 있다. AI 바우처도 수요기업과 공급기업을 연결하지만 신약개발에 특화된 사업은 아니다.
●해외선 제약사-AI 협업 본격화
이미 글로벌 제약업계에서는 제약사의 신약 연구 경험과 AI 기업의 기술을 결합하려는 협력이 활발해지고 있다. 스위스 제약기업 노바티스는 2019년 마이크로소프트와 ‘AI 혁신연구소’를 세우고, 자사가 축적한 연구 데이터와 마이크로소프트의 AI·클라우드 기술을 활용해 후보물질 발굴과 신약개발의 효율을 높여 왔다.
AI 신약개발 기업 인실리코 메디슨도 AI로 질병 표적을 찾고 새로운 화합물까지 설계한 특발성 폐섬유증 치료제 후보를 18개월 만에 도출해 임상 2상 단계까지 진전시켰다.해외에서는 제약사의 데이터·연구 역량과 AI 기술의 결합해 연구 효율화뿐 아니라 실제 신약 후보 도출과 임상 진입으로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
이에 국내에서도 중소 제약사와 AI 기업의 기술과 보유 데이터를 비교해 적합한 상대를 연결하고, 소규모 시범연구에서 본격 공동 R&D로 확대하는 단계적 지원 체계를 마련해야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전문가들은 병원, 대학, 연구기관에 흩어진 임상·실험 데이터를 표준화해 안전하게 공동 활용할 수 있는 기반도 필요하다고 제언한다.
표준희 한국제약바이오협회 AI신약연구원장은 “임상·연구 데이터를 표준화하고 제약사와 AI 기업의 협력 기반이 없으면 AI가 신약개발의 초기 실패를 줄이는 실질적인 수단으로 자리 잡기 어렵다”며 “데이터·AI·실험을 연계한 연구 체계와 실증 과제, 안정적인 예산과 고성능 컴퓨팅 자원 지원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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