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사 설명은 틀렸습니다”…‘팩폭’으로 게임사 긴장시킨 유저들

  • 동아일보
  • 입력 2021년 4월 12일 20시 01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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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일 서울 송파구 시그니엘서울 그랜드볼룸에서 열린 고객간담회 (메이플스토리 유튜브 캡처) 2021.04.12 © 뉴스1
11일 서울 송파구 시그니엘서울 그랜드볼룸에서 열린 고객간담회 (메이플스토리 유튜브 캡처) 2021.04.12 © 뉴스1
“회사의 설명은 틀렸습니다. 우리가 직접 계산해봤어요.”

“추정매출 5000억 원의 게임을 180명이 운영하는 건 무리 아닙니까. 재투자를 늘려야 합니다.”

11일 오후 서울 송파구 시그니엘서울 그랜드볼룸. 넥슨이 대표 게임 ‘메이플스토리’ 이용자 대표 10명을 초청해 개최한 간담회에서는 연신 유저들의 날카로운 질문이 쏟아졌다. 단순한 분노 표출이 아니라 숫자와 팩트에 기반한 송곳질문에 운영진들은 거듭 진땀을 흘렸다. 유튜브 등 온라인으로 생중계된 간담회는 동시 접속자가 15만 명에 이를 정도로 관심이 뜨거웠다. 오후 2시부터 밤 10시까지 8시간 동안 약 30만 명이 참여해 댓글 등으로 적극적으로 의견을 표출했다.

● PPT만 수백 장, ‘팩트’로 폭격
이번 간담회는 지난달 넥슨이 확률형 아이템의 운영정보를 공개한 뒤 일부 최상급 아이템 조합이 애초에 불가능하게 설정됐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이용자들의 분노를 달래기 위해 열렸다. 이용자 대표들은 구체적 수치와 사례를 들어 회사 측의 설명을 일일이 반박했다. 게임 아이템 운영과 보상의 문제점을 꼬집는 내용의 자료를 파워포인트(PPT)로 수백 페이지나 제시하기도 했다.

특정 아이템 조합이 나올 수 없다는 지적에 대해 운영진이 “게임 내 최고옵션이 아니어서 ‘777(잭팟) 없는 슬롯머신’이란 비유는 적절치 않다”고 해명하자 한 유저는 운영진이 거론하지 않은 다른 사례를 끄집어내 맞받아쳤다. 이 유저는 넥슨이 제시한 확률 정보를 토대로 “사냥 부분 최고 옵션의 조합이 불가능하단 사실을 확인하려면 5만 번의 조합, 4500만 원을 투자해야 한다. 변명의 여지가 없다”고 했다. 운영진은 “그 부분은 자각하지 못했다”고 인정했다.

유저들의 문제제기에 대한 회사의 대응에 대해서도 팩트로 공격했다. 지난달 넥슨이 공지한 해명문을 문장 하나하나 짚어가면서 “이 부분은 표현이 적절하지 못했다”고 지적하기도 했다. 한 유저는 “게임 게시판에 올라온 건의사항 가운데 16%를 차지하는 질문에는 회사 측이 답을 하지 않고, 0.6%에 해당하는 질문에만 대응했다”고 꼬집었다.

● 직접 계산해 대안 제시, 촌철살인 비유도
또 다른 유저는 확률 기댓값을 직접 계산해 게임 개선 아이디어를 제안하기도 했다. 원하는 아이템을 얻기 위해 엄청난 돈을 쏟아 붓는 폐해를 막기 위해 일정 횟수를 시도하면 확정형 보상을 받을 수 있는, 이른바 ‘천장’ 시스템을 건의한 것이다. 이 유저는 시뮬레이션 결과를 제시하며 “이렇게 해도 아이템 가치 하락 등으로 게임 내 균형이 흔들리지 않는다”고 했다. 운영진은 “확률 시스템의 부정적 경험을 줄일 수 있을 것으로 본다”며 검토의사를 밝혔다.

한 유저는 게임의 스토리가 부실하다고 지적하며 상황에 맞지 않는 우스꽝스러운 대사를 찾아내 운영진에게 “이 대사 좀 직접 읽어주시겠습니까”라고 부탁하기도 했다. 메이플스토리의 연 매출액을 역대 흥행영화들의 제작비와 비교하며 “과연 그만큼의 감동을 주었느냐”며 질타했다. 이 과정에서 게임의 스토리텔링을 전담하는 팀이 없다는 사실이 확인되자 “이제 메이플스토리에는 스토리가 없어 ‘메이플’이 됐다”는 탄식도 나왔다.

간담회 중에는 게임 캐릭터 디자인 등에 대한 전문적인 질문도 나와 운영진이 혀를 내두를 정도였다. 한 유저는 “게임 무기 중에 하나인 칼의 각도가 5도 휘어진 상태로 출시된 이유가 무엇이냐”고 질타했다. 캐릭터의 머리 스타일과 맞지 않는 장식 등을 직접 그림으로 그려 보이며 비판하고, 아이템을 제작하는 팀의 인력 구성까지 따지기도 했다.

● 집단지성으로 진화한 유저들
8시간에 걸친 간담회 동안 유튜브 댓글창과 게임 커뮤니티 게시판도 불이 붙었다. “팩트로 두드려 팼다” “회사 답변도 랜덤(뽑기)” “간담회가 아니라 청문회 같다” 등의 피드백이 분당 수백 개씩 쏟아졌다.

이용자들의 날카로운 지적에 넥슨은 “시대의 흐름에 맞추지 못한 소통 부재가 문제였다”며 고개를 숙이고 고객자문단 창설을 약속했다. 6개월 단위로 15~20명의 이용자들로 구성된 자문단을 만들어 게임 운영의 ‘동반자’로 삼겠다는 것이다. 아이템 확률 추가 검증 및 공개도 계획대로 이어갈 방침이다.

전문가들은 18년차 장수게임의 운영 방식을 원점 재검토하게 한 유저들의 진화에 주목하고 있다. 그동안 게임 정보비대칭으로 열세였던 유저들이 게임커뮤니티와 유튜브 공론장 등을 통해 공유, 분석한 데이터들을 기반으로 게임 아이템 및 운영 문제점을 바꿔가고 있다는 것이다. 김정태 동양대 게임학부 교수는 “프로그래밍 역량이 있고 소통에 능한 유저들이 집단 지성으로 게임하듯 문제를 해결하고 있다”며 “유저 참여를 늘리는 ‘게임 민주화’가 수십 년 지속가능한 지식재산권(IP)의 선결 조건”이라고 말했다.

전남혁 기자 forward@donga.com
신동진 기자 shine@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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