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에서/윤신영]상상력을 살릴 조건

  • 동아일보
  • 입력 2016년 6월 17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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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신영 과학동아 편집장
윤신영 과학동아 편집장
가끔 청중 앞에서 강연하거나 함께 대화할 일이 있다. 그때마다 묻는다. “인간은 상상력이 뛰어난 존재일까?” 대부분 멈칫한다. 아마 이런 상상을 하리라. ‘우리, 유일하게 상상력을 지닌 존재 맞지 않나? 게다가 요즘은 그 상상력을 더 계발하라고 난리고. 상상력은 지식보다 중요하다는 아인슈타인의 말도 즐겨 인용되지.’

내가 말한다. “인간은 생각보다는 상상력이 좋은 존재가 아니다. 우린 오로지 본 것만 상상할 수 있는, 지극히 제한된 상상력을 지닌 존재다.” 청중은 알쏭달쏭한 표정을 짓는다. 나는 인류가 만든 대표적인 상상력의 산물, 괴물의 그림을 보여준다. 서양 신화의 미노타우로스는 사람의 몸통에 소의 머리와 꼬리를 지닌 이상한 존재다. 분명 괴물은 괴물인데, 가만 보면 의외의 사실을 알 수 있다. 괴물을 구성하는 요소 하나하나는 이미 현실에 있는 익숙한 것들이다. 괴물이 탄생한 것은 그 조합이 낯설기 때문이다. 사실 인간이 상상한 대부분의 괴물이 이렇다. 히드라는 머리가 여럿 달린 물뱀의 형상인데, 구성하는 신체 부위(머리)의 수가 달라졌을 뿐 전체적인 몸의 얼개는 그대로다. 동양의 기서 ‘산해경’의 기이한 동물들은 어떤가. 꼬리 아홉 달린 여우, 인간의 머리가 아홉 개 달린 뱀, 외다리로 선 소 등 역시 익숙한 부위를 재조합한 것뿐이다. 게다가 머리가 둘 달린 뱀이나 다리가 여럿 달린 새는, 실제로 자연에서도 심심치 않게 볼 수 있는 기형이다. 구글 검색창에 ‘머리 둘 달린 뱀(two headed snake)’이라고 치면 화면 가득 실제 사진을 볼 수 있다.

인류 문명의 여명기에도 그랬다. 4만 년 전 만들어진, ‘예술가 인류’의 탄생을 증명하는 수준 높은 상아조각 ‘사자 인간’은 사자 머리를 지닌 인간의 모습이다. 미노타우로스의 선구자랄까. 이 작품에 대해 선사시대를 연구한 고고학자에게 “당시 인류가 이미 수준급의 상상을 할 수 있었다는 의미 아닌가”라고 물은 적이 있다. 고고학자는 “아니다. 사자의 탈을 쓴 사람의 모습을 조각했을 뿐”이라고 답했다.

인간의 상상력은, 마치 양식장 속 광어의 움직임처럼 제한된 영역 안에서만 자유로운 능력이다. 기존의 축적된 경험 체계 안에서만 순조롭게 작동하기도 하다. 그런데 현실에서는 다른 이야기를 하는 사람이 많다. 이들에게 상상력이란, 밑도 끝도 없이 창발하는 천재적 영감 내지는 우주적 계시다. 어찌나 만능인지, 상상력만 계발하면 갑자기 무슨 문제든 풀고 그 분야에서 일류로 도약할 수 있을 것 같다. 물론 상상력은 중요하지만, 견실한 지적 노동이 필요한 분야에서 어떤 사람을 세계적 수준으로 도약시킬 만큼은 아니다. 괴물의 사례에서 보듯, 축적된 경험이나 지식(동물의 각 부위)이 뒷받침되지 않으면 그걸 조합해 낯선 존재(괴물)를 만드는 능력은 탄생하지 않는다.

‘알파고 쇼크’ 이후, 인공지능 시대의 미래 교육을 말하는 사람이 많아졌다. 상상력이나 창의력, 유연한 융합적 사고 같은 모호한 말도 다시 강조되고 있다. 한 미국 뇌과학자의 말은 이런 분위기에 일침이 될 만하다. “알파고가 태어난 건 개발자 데미스 허사비스가 천재여서가 아니다. 그는 이미 세계 정상급 연구 성과를 낸 견실한 신경과학자였고, 그가 공부한 영국 유니버시티칼리지런던은 의사 결정과 관련한 인지신경과학 분야의 세계 판도를 20여 년째 이끌며 성과를 축적한 곳이다. 알파고가 지금, 거기에서 태어난 건 필연이었지, 갑작스러운 도약이 아니었다.”

윤신영 과학동아 편집장 ashilla@donga.com
#아인슈타인#인간의 상상력#알파고#인공지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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