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점 뽑는’ 내과의사 ‘코 깎는’ 산부인과의사

  • 입력 2008년 1월 3일 14시 01분


코멘트
3년 전 개원한 내과 전문의 강모(40) 원장은 '강OO 내과의원"이었던 병원 간판을 '강OO 의원'으로 바꿔 달았다.

간판 아래쪽에는 '진료과목: 피부과'라는 문구를 추가했다.

강 원장은 "막상 개원을 하고 보니 수익성도 낮고, 의료사고 위험도 있어 전문의로 활동하는데 한계가 느껴졌다"며 "보다 안전하고 돈을 많이 벌 수 있는 피부과 진료를 하기 위해 간판을 바꾸고 이력에서도 '내과'를 지웠다"고 말했다.

●전문의들의 '전공포기' 바람

레지던트 과정을 마치고 개원을 준비하는 일부 전문의들 사이에서 '전공 포기' 바람이 불고 있다.

시술이 어렵고 의료사고의 위험이 있는데다 보험 수가가 낮아 수입도 적은 산부인과 내과 등의 전문의들이 고수익을 낼 수 있는 피부과 성형외과 등의 진료에 나서고 있는 것.

현행 의료법상 의사 면허만 있으면 전공에 관계없이 모든 의료행위를 할 수 있다. 또 대학 외에도 각종 학회나 연수, 다른 전문의의 개인지도, 의료기기 업체의 연수 등 필요한 시술법을 익힐 수 있는 창구가 많다.

전문의들은 이들 창구를 활용해 새로운 기술을 익힌 뒤 인턴, 레지던트 과정을 거치며 5년간 갈고 닦은 기술과 지식을 포기하는 것이다.

강 원장 역시 피부과 진료 시작 전 3개월 여간 진료시간을 피해 피부과 학회 연수에 참가했다. 선배 전문의에게 월 200만 원가량을 지급하고 개인지도를 받으며 피부과 진료를 준비했다.

●돈과 사회적 책임 사이에서 갈등

최근 피부과 진료를 시작한 산부인과 전문의 신모 원장(37).

산부인과만 진료하던 시절 신 원장은 수시로 새벽에 잠을 깨고 병원에 나가 아이를 받았다. 방심하면 산모나 태아의 건강에 이상이 생길까봐 늘 긴장한 상태에서 시술에 나섰다.

"의료사고 한 번이면 10년 번 돈 다 까 먹는다"는 게 산부인과 계의 정설. 다행히 큰 사고 없이 시술을 마쳐도 그가 받는 돈은 건강보험 급여와 산모 본인 부담금을 포함해 모두 50여만 원 수준이었다.

신 원장의 삶은 피부과 진료 시작 이후 180도 바뀌었다.

피부과 진료를 주로 하는 요즘. 신 원장은 정시 출퇴근하는 규칙적인 생활에 익숙해지기 시작했다.

레이저 기기를 이용한 주름제거 시술 한 번에 그가 받는 진료비는 주름 상태에 따라 100만~400만원. 당연히 소득도 크게 늘었다.

강 원장은 "내가 사회적 책임을 회피하고 있다는 죄책감이 들 때도 있다"고 한다. 그는 "전공분야 진료를 하고 싶어 늘 손이 근질근질하다"면서도 "하지만 나도 가장(家長) 아니냐"며 말끝을 흐렸다.

●피부과의사들 "간판 제대로 봅시다" 당부도

유명 한의대를 졸업하고 재활전문 전문의 자격을 딴 박 모 원장(41)은 "전문의 자격을 따기 위한 허비한 세월이 아깝다"며 "요즘은 후배들에게 레지던트 따지 말고 바로 돈 되는 진료과목을 선택해 개원을 하라고 조언 한다"고 말했다.

박 원장은 현재 탈모 전문의로 활동하고 있다.

"의사들은 어찌 보면 헌신하는 직업입니다. 남들이 젊음을 즐길 때 사명감 하나로 미친 듯이 공부했습니다. 돈 벌겠다는 목표는 가져본 적도 없습니다. 하지만 젊음을 바친 대가가 '젊음을 바치지 않은 사람'과 별 차이가 없다는 걸 알게 됐을 때 절망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비전문가들이 진료를 하다 보니 의료서비스의 질이 낮아진다는 지적도 있다.

대한피부과의사회는 최근 "병, 의원 간판을 제대로 봐 달라"고 환자들에게 호소하고 나섰다. 간판에 '피부과'라고 표시하지 않고 '진료과목 피부과'라고 돼 있는 병원에서는 전문의가 아니므로 제대로 된 진료를 받지 못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전공을 잊은' 의사들은 "의대를 나온 사람이라면 어떤 진료과목이든 기본적으로 다 볼 수 있다"며 "숙련도가 필요할 뿐이며 진료과목을 바꾸기 전에 누구나 충분한 트레이닝 과정을 거친다"고 주장한다.

신학철 피부과 원장은 "진료과목에 관계없이 뛰어난 실력을 가진 의사에게 그만한 보상이 주어지는 시스템이 없어 아쉽다"며 "지금 한국 의료계에서 일어나는 일은 '서글픈 현실'이라고 밖에 표현할 방법이 없다"고 말했다.

나성엽 기자 cpu@donga.com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댓글 0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