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자들이 밝히는 '잠의 과학'…잠 잘자면 왜 기억이 잘될까

  • 입력 2004년 2월 3일 17시 56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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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려운 문제를 붙잡고 끙끙대고 있을 때 미국이나 영국에서는 ‘sleep on it’이란 말을 한다. 말 그대로 한숨 자고 나서 생각해보란 뜻. 수험생들에게는 호사스럽기 그지없는 말로 들릴지 모르지만 최근 과학자들의 연구에 따르면 잠을 자는 것이 실제로 문제 해결에 도움을 준다. 독일 뤼베크대 신경내분비학과의 얀 본 박사 연구팀은 간단한 수학 퍼즐을 통해 잠을 자는 것이 문제 해결에 어떤 도움을 주는지를 알아냈다.》

실험 결과 문제풀이를 여러 번 한 다음 8시간 동안 수면을 취한 그룹이 깨어 있었던 그룹에 비해 다음 문제풀이에서 두 배 정도 우수한 능력을 보였다. 이 연구는 ‘네이처’ 1월 22일자에 소개됐다.

과학의 역사를 살펴보면 꿈을 꾸다가 문제를 해결한 경우가 종종 있다. 원소 주기율표를 만든 러시아의 드미트리 멘델레예프는 꿈속에서 원소들이 공중에서 떨어지면서 자기 자리를 잡아가는 것을 보았다고 한다. 또 프리드리히 케쿨레는 뱀들이 서로 꼬리를 물고 있는 꿈을 꾸고 벤젠의 고리모양 분자구조를 생각해냈다고 한다. 이들처럼 본 박사의 실험에서 잠을 잔 사람들은 문제 해결에 대한 ‘통찰력’을 얻은 셈.

실험에 동원된 수학 퍼즐은 세 가지 숫자(1, 4, 9)를 무작위로 배열해 8자리 수를 만들었다(예 11449494). 여기에 두 가지 규칙을 적용시켜 새로운 7자리 배열을 만들게 했다. 인접한 두 수가 같으면 다음 배열에선 그 수를 쓰고, 다르면 세 가지 숫자 중 나머지 수를 쓰는 식이다. 즉 1과 1은 1이 되고, 1과 4는 9가 되는 식이다. 퍼즐은 7자리 수로 이뤄진 새로운 배열에서 마지막 숫자를 알아내는 것.

흥미로운 점은 일일이 계산하지 않고도 답을 알아낼 수 있는 숨겨진 지름길이 있다는 사실. 실험 결과 잠을 잔 그룹에서는 60%가 지름길을 알아냈지만 나머지 그룹에서 알아낸 사람은 22%에 불과했다.

일반적으로 잠을 자는 동안 기억들이 정돈되는 과정이 일어난다고 한다. 낮에 본 사람이나 사건, 대화에 대한 기억들은 일단 대뇌의 해마융기에 저장됐다가 신피질로 옮겨가 영구기억이 된다. 연구팀은 “잠을 자는 동안 퍼즐 풀이에 대한 기억들이 정돈되면서 숨겨진 해법을 찾게 된 것”이라고 설명했다.

잠이 문제 해결을 도와준다는 사실은 다른 연구에서도 확인됐다. 미국 시카고대 심리학과의 대니얼 마고리아시 교수 연구팀은 알아듣기 힘든 외국어를 공부한 뒤 잠을 자고 온 그룹이 깨어 있었던 그룹보다 새로운 단어를 훨씬 쉽게 이해한다는 실험 결과를 지난해 ‘네이처’ 10월 9일자에 발표한 바 있다.

그런데 잠을 잤는데 케쿨레나 멘델레예프처럼 꿈을 꾸지 않았다면 모든 게 허사일까. 최근 연구에 따르면 일단 푹 잤다면 안심해도 좋다.

꿈을 꿀 때는 눈동자가 빨리 움직이는 렘(REM)수면 상태에 들어가게 되는데 전체 수면의 20∼25%가 이런 상태다. 과학자들의 꿈속 연구는 기억을 영구화시키는 유전자가 이 렘수면 상태에서 작용하기 때문으로 설명되기도 했다. 이에 비해 꿈을 꾸지 않고 깊은 잠을 잘 때는 뇌파가 느린 서파수면 상태에 이르며, 수면시간의 대부분을 차지한다.

그런데 최근 연구는 렘수면보다 서파수면이 기억을 정돈하고 새로운 통찰력을 얻는 데 더 중요하다는 점을 보여주고 있다.

미국 듀크대 시다르타 리베이로 박사는 쥐에게 처음 보는 물체를 보여주고 잠을 자는 동안 뇌가 어떻게 활동하는지를 살펴보았다. 그 결과 뇌의 해마융기와 신피질 모두에서 특이한 뇌파가 감지됐다. 즉 새로운 기억들을 정돈해서 영구화시키는 작용이 활발히 일어난 것. 이때 새롭게 발견된 점은 뇌 활동이 렘수면보다 서파수면에서 더 강했다는 사실.

리베이로 박사는 ‘퍼블릭 라이브러리 오브 사이언스(PLOS)’ 1월 19일자에서 “서파수면의 긴 시간 동안 뇌는 개별 기억을 다시 떠올려 증폭하는 역할을 하며 짧은 렘수면에서는 이 기억들을 공고히 하는 유전자를 순간적으로 작동시킬 뿐”이라고 설명했다. 꿈꾸는 시간보다 깊은 잠을 잘 때가 뇌의 기억 기능이 활성화되는 데 더 중요한 셈이다.

공부에 지친 학생들에게 ‘한숨 자라’는 과학적 충고를 해보는 것은 어떨까.

이영완 동아사이언스기자 puset@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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