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너지는 이공계 대책 없나

  • 입력 2002년 2월 13일 20시 24분


새학기에 고등학교 2학년이 되는 서울 M고 L군(16)은 최근 이과반에서 문과반으로 옮겼다. 이 학교는 1학년 1학기에 문과나 이과를 선택한 뒤 1학년 말에 최종 조정하도록 한 결과 이과를 택했던 100여명이 문과로 옮기겠다고 신청해 겨우 절반 정도만 전과를 허용했다.

L군은 “연구원인 친척 형으로부터 ‘이과는 고생만 하고 돈도 못버니 고시공부나 하라’는 조언을 듣고 생각을 바꿨다”며 “법과대나 경영대에 진학할 생각”이라고 말했다.

서울대 화학과 졸업반인 A씨(28)는 지난해 대학원 진학을 포기하고 외국계 보험회사의 영업사원으로 취직했다. 대학원을 마치고 연구원으로 취직해도 금융권의 대졸 신입사원보다 월급이 훨씬 적은 데다 승진도 어려운 이공계열을 전공해 봤자 비전이 없다는 판단이 섰기 때문.

A씨는 “전망도 없이 밤을 새며 석박사 과정을 공부하는 친구나 선후배들을 보면 안타깝다”며 “동창생의 절반 정도가 화학 공부를 포기하고 고시나 변리사 공부에 매달리고 있다”고 말했다.

고교생은 물론 대학생 대학원생까지 까다롭고 어려운 이과 공부를 꺼리는 이공계열 기피 현상이 갈수록 심해지면서 국가 경쟁력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치는 이공계 교육이 위기에 처해 있다.

▽이공계 기피 실태〓최근 대학수학능력시험 응시자를 보면 해마다 자연계 비율이 줄고 있다. 98학년도 42.4%에서 2002학년도에는 26.9%로 줄어든 반면 인문계는 48.4%에서 56.4%로 늘었다.

또 서울대 자연대와 공과대의 합격자 등록률이 80%대에 그쳐 사상 처음으로 추가모집까지 했지만 미달돼 다시 추가모집을 하고 있다.

서울 S여고 P교사는 “성적도 우수하고 소질이 있는 학생에게 이과로 진학하도록 권해도 말을 듣지 않는다”고 말했다.

고교 이과반에서도 물리 화학 등 이공계열의 기초가 되는 선택 과목보다 수능시험에서 점수를 따기 쉬운 지구과학이나 생물을 선택하는 학생들이 압도적이다.

한양대 이영무(李永茂) 교수가 최근 서울 6개 고교 수험생 1309명의 수능시험 과학탐구의 선택과목을 조사한 결과 지구과학Ⅱ 36.2%, 생물Ⅱ 32.2%, 화학Ⅱ 25.6% 등이었고 어렵다는 물리Ⅱ를 선택한 학생은 78명으로 6% 뿐이었다.

이공계 지원자가 감소한 원인으로 대입 교차지원이 거론되고 있지만 근본적인 원인은 되지 않는다는 분석이다. 2001학년도에 인문계로 수능시험을 치른 뒤 교차지원으로 자연계에 입학한 학생은 전체 자연계 입학생의 11.4%(1만6593명)에 불과했다.

정기오(鄭冀五) 교육부 인적자원정책국장은 “이공계 기피 문제는 지원자도 줄고 있지만 자연계열의 우수한 학생들이 의과대나 한의대 등 안정적 직업이 보장된 분야에 몰려 문제가 더 심각하다”고 말했다.

▽사회패턴이 바뀐다〓이공계 기피는 사회 변화의 한 현상이고 선진국들도 같은 고민을 하고 있다. 국가과학기술자문회의 조사에 따르면 청소년의 39.6%가 의사 변호사 세무사 등 전문직을 선호했고 연예인은 24.5%, 컴퓨터 게이머는 15.9%인 반면 교수와 연구직은 2.2%, 과학기술인은 0.4%에 불과했다. 산업별 취업자수 변동 추이를 보면 서비스업의 비중은 91년 59.3%에서 97년 67.3%로, 다시 2001년 71.6%로 계속 늘고 있다.

이는 이공계 출신이 보수나 승진 기회 등에서 인문계에 비해 뒤지고 전직할 때에도 직업의 유연성이 떨어지는 점도 크게 작용하고 있다는 분석이다.

한국직업능력개발원 진미석(陳美碩) 직업진로정보센터소장은 “외환위기 이후 구조조정 과정에서 기술계 연구인력이 대거 일자리를 잃는 등 이공계 출신의 직업에 대한 불안감이 크다”며 “이공계는 기술 변화의 속도가 빨라 적응하기 어려워 상대적으로 스트레스가 적은 인문계를 선호하는 것 같다”고 말했다.

▽대학도 골머리〓대학과 대학원들은 이공계열 지원자가 부족한 데다 학력마저 떨어져 고민하고 있다. 인문계에서 교차지원으로 자연계에 합격한 학생들이 물리 화학 등 기초과학을 배우지 않았기 때문이다.

서울대는 올해부터 이공계열 신입생의 경우 물리 시험을 치러 성적이 낮은 학생은 고교 수준의 물리까지 가르치기로 했다.

오세정(吳世正·물리학) 교수는 “대학원 지원자 중 상당수가 학부 교양 과목 수준의 물리 문제도 풀지 못해 아예 선발을 포기할 정도”라며 “대학원 학생이 급감해 외국 유학생으로 연구인력을 채워야 할 형편”이라고 말했다.

충북대 자연대와 공대는 2년 전부터 대학원 정원을 채우지 못하게 되자 교수들이 연구비를 쪼개 중국과 베트남 유학생 25명을 석박사 과정에 유치하고 있다. 연구 조교가 부족해 연구프로젝트를 기한 내에 끝내지 못하는 교수들이 늘어 지난해 연구 지연 사유서가 5건이나 제출되는 등 연구 과정에서의 차질이 심각한 수준이라는 것.

▽정부가 나서라〓병역특례 전문연구요원으로 선발된 서울대 공대 박사과정 조모씨(26)는 “박사학위를 받기까지 10여년 동안 공부하고 연봉 3000만∼4000만원에 국내 기업이나 연구소에서 5년을 근무해야 한다”며 “비슷하게 공부하고도 보수가 훨씬 좋은 의대에 진학하지 않은 게 후회스럽다”고 말했다.

윤대희(尹大熙) 연세대 공대학장은 “전문연구요원의 의무복무 기간을 5년에서 3년으로 줄이고 초중고교의 과학실험 교육을 강화해야 한다”고 말했다.

직능원 진미석 소장은 “이공계 교육은 국가 경쟁력과 직결된 만큼 시장 원리에만 맡겨둘 게 아니라 국가가 개입해 적극적인 육성책을 마련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이인철기자 inchul@donga.com

박 용기자 parky@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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