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육]국내학자가 쓴 '수학原書' 美대학원생들 공부한다

  • 입력 2001년 7월 1일 18시 31분


강석진 교수(왼쪽)와 홍진 박사가 칠판에 다양한 모델을 그려가며 토론을 벌이고 있다
강석진 교수(왼쪽)와 홍진 박사가 칠판에 다양한
모델을 그려가며 토론을 벌이고 있다
‘미국 MIT대 대학원생이 국내 학자가 쓴 수학교재로 공부한다?’

열악한 국내 기초학문 여건을 생각한다면 상상하기 힘들지만 ‘꿈 같은 일’이 실현되게 됐다.

서울대 수리과학부 강석진(姜錫眞·39) 교수와 그의 제자인 한국과학기술원(KAIST) 부설 고등과학원 홍진(洪進·28) 박사가 저술한 ‘양자군과 결정기저 개론(Introduction to Quantum Groups and Crystal Bases)’이 미국수학회(AMS)의 대학원생 교재 시리즈(GSM)로 8월 출간된다.

쏟아지는 비가 연구실 창문을 시끄럽게 두드리던 지난달 29일 오후 서울대 수리과학부 4층 교수 연구실. 반바지 차림의 강 교수와 앳된 얼굴의 홍 박사가 A4 용지에 인쇄한 교재 원고를 들고 조목조목 칠판에 문제점을 써 내려가면서 교정작업에 몰두하고 있었다.

“입체적인 개념을 이용해 설명한 부분을 조금 더 보완해야겠어. 게다가 잘못된 영어 문장도 바로잡아야겠고….”

국내 학자가 GSM의 저자가 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학계에서는 국내 자연계 대학원 교재가 대부분 외국 서적인 현실에서 강 교수 등의 저술을 ‘학문 역수출 사건’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93년부터 지금까지 38권이 출간된 이 시리즈의 저자는 대부분 미국과 유럽 등의 유명 대학 교수들. 이 시리즈는 세계 각국의 대학원 교재로 사용되며 각 대학이 도서관에 비치할 정도로 권위가 있다.

AMS는 1월 말 두 사람의 초고를 검토한 뒤 “양자군에 관한 어떤 책보다 ‘결정기저’ 개념이 구체적으로 잘 소개되어 있다. 독특한 최신 이론을 포함해 예시와 요약 등이 훌륭해 GSM으로 출간하기로 했다”고 강 교수에게 통보해 왔다.

“양자군 이론은 열역학 통계역학 수리물리학 등에 널리 쓰이는 수학의 기초이론입니다. 이 이론은 추상적인 개념인데 ‘블록’을 쌓듯이 입체적으로 쉽게 풀어 썼습니다.”

94년 미국 노트르담대 교수직을 버리고 모교인 서울대에 부임한 강 교수는 97년 서울대 박사과정 학생에게 강의하면서 이 책을 쓰기 시작했다.

“우수한 학생들에게 외국 교재로 가르칠 때마다 자존심이 상했습니다. 낮은 보수와 잡다한 행정업무 등 열악한 환경 속에서도 국내 수학 수준이 외국에 결코 뒤지지 않는다는 것을 알리고 싶었습니다.”

홍 박사는 당시 강 교수의 강의를 들었던 제자. 홍 박사는 강 교수의 강의와 박사과정 학생들의 토론을 정리했다. 강 교수는 99년 미국 MIT대 교환교수 시절 강의록과 자신의 최신 이론 등을 보완해 4년 만에 초고를 완성했다.

강 교수는 “박사과정 학생들과 토론으로 책을 검증할 만큼 학생들의 도움이 컸다”면서 “제자이자 동료였던 박사과정 학생 9명의 이름을 서문에 싣겠다”고 말했다.

강 교수는 한때 과로와 스트레스로 위염에 걸려 78㎏이던 몸무게가 64㎏까지 줄 정도로 체력이 약해졌지만 학교 근처 집에서 저녁을 먹고 다시 연구실에서 밤 늦게까지 원고에 매달렸다.

잦은 회의와 행정업무를 피해 평일에는 가끔 대학로 등지의 카페에서, 주말에는 휴양지에서 저술에 몰두했다. 99년 한국과학기술한림원의 ‘젊은 과학자상’ 상금 일부도 연구경비로 들어갔다.

94년 자연대 축구부 감독을 맡아 학생들과 어울려 운동했던 것이 가장 기억에 남는다는 강 교수는 그러나 ‘열악한 서울대의 연구환경에 실망해’ 2일 고등과학원으로 자리를 옮긴다

<박용기자>parky@donga.com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