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지털 키드]"인터넷이 학교… 컴퓨터가 교과서"

  • 입력 2000년 4월 9일 20시 21분


《4일 밤 8시. 서울 영등포에 자리잡은 청소년직업체험센터 ‘하자’의 웹진 작업장엔 활기가 넘쳤다. 교복차림 또는 ‘노랑머리’의 앳된 얼굴 예닐곱명이 컴퓨터 모니터를 바라보며 조급하게 마우스를 클릭하고 있었다. 3월말 창간호를 낸 10대용 웹진 ‘틴즈비즈’(teens-biz)의 2호 마감일이 8일이었기 때문.

컴퓨터자격증을 세 개나 갖고 있는 편집장 신호철군(16·서울 광문고1)은 하자가 문을 연 지난해 12월 이후 학원에 가지 않는 주말과 평일 저녁은 이곳에서 ‘산다’.

음악 담당 손보해양(17)은 낮부터 하자에서 볼 수 있다. 고교 1학년이던 지난해 자퇴했다. 바뀌는 세상에 대해선 가르쳐주지 않는 중학시절 3년이 너무 아까웠는데 또 그렇게 3년을 허비할 수는 없었다.

“공부요? 평생해야 하는데 언제면 어때요? 지금은 우선 일을 좀 해보고 싶어요.”

‘쉬면서’ 배운 웹디자인으로 지금은 ‘돈을 줄테니’ 홈페이지를 제작, 관리해달라는 주문을 받을 만큼 실력을 키웠다.》

▼바뀌는 10대의 풍경▼

‘학생 땐 공부나 해’라는 사회의 통념을 깨며 경쟁력을 갖춘 사업가가 되거나 학교를 박차고 나와 하고 싶은 일을 맘껏 하는 ‘비학생 디지털키드’가 늘고 있다.

외국에선 자신의 장난감 회사를 수백만 달러에 처분한 미국의 13세 ‘벤처소년’이 지난해 언론의 스포트라이트를 받았다. 올 3월엔 미국의 15세 인터넷사업가가 일본의 한 기업에 사외이사로 영입되기도 했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해지는 것일까. 전문가들은 컴퓨터를 다루는 기술과 사이버세상의 정보력을 장악하고 있는 디지털키드가 오히려 ‘사업 경쟁력’이 있기 때문이라고 분석한다. 게다가 이들은 소비의 주체로 떠오른 10대의 요구를 가장 잘 알고 있기도 하다.

최근 영국의 선데이타임스도 “영국의 인터넷 백만장자 100인 중 최연소자는 유태인을 위한 사이트를 운영한 17세의 벤자민 코헨이었다”며 “인터넷사업이 연령이나 학력과 같은 진입장벽을 없앴다”고 보도했다.

▼돈을 버는 아이들▼

컴퓨터그래픽이 뛰어난 손형규군(12·대구 시지초등학교 6년)은 지난해 12월부터 수출용 3차원 애니메이션 영화 ‘포크의 모험’의 로고제작을 맡았다.

PC통신사 유니텔은 지난 달 10대 8명을 명예사원으로 뽑았다. 홈페이지제작 인터넷검색 등에 뛰어난 능력을 갖춘 이들은 방과 후 재택근무 형식으로 ‘온라인 학습서비스’ 등 주로 10대의 ‘니드’를 읽는 아이디어를 낸다. 물론 매달 장학금과 참여 프로젝트에 따라 성과급도 받는다.

웹디자인에 뛰어난 김주우군(17·서울 당곡고 2)은 곧 유니텔의 웹진 제작에도 참여할 예정. “좋은 대학에 갈 성적은 아니었는데 그러면 우리나라에선 치명적이죠. 유니텔에서 학력파괴의 길을 열어줬어요.”

▼공부가 다냐?▼

강형관군(15·서울 강서고1)은 최근 마이크로소프트(MS)사의 네트워크용 운영체제인 윈도NT 관리자격증을 땄다. 7개월간 과외학원 대신 컴퓨터학원에서 노력한 결과. 학교성적은 중간정도지만 그는 걱정하지 않는다.

양쪽 귀를 4개씩이나 뚫고 금속을 좋아해 옷핀까지 귀걸이로 사용하는 김남이양(17). 지난해 고교를 자퇴한 뒤 방송고에 다니면서 하자센터에서 청소년을 위한 파티기획을 한다. 자신이 좋아하는 ‘노는 것’에서 미래를 발견했으므로.

“학교다닐 땐 배울게 없다고 생각했는데 파티기획을 하다보니 음악 디자인 미술 등 아는 게 너무 없다는걸 깨달았어요. 열심히 배워서 전문 파티기획자가 될거예요.”

연세대 조한혜정교수(사회학)는 “지금과 같은 다품종 소량생산체제에선 남과 같아서는 성공할 수 없다”며 “자신만의 독특한 취향을 발전시킨 다양한 분야의 전문가가 필요한 시대이며 이는 디지털키드의 오늘과 내일이기도 하다”고 말했다.

그렇다면 지금의 공부잘하는 ‘범생이(모범생)’들은? 젊은 벤처사업가가 된 이들 ‘날라리’밑에서 착실한 월급쟁이로 일할 수도 있지 않을까? 날라리는 더 이상 문제아가 아니라 공부가 아닌 다른 것, 컴퓨터 대중문화 등 어느 한 분야에 대한 ‘문화자본’이 풍부한 아이들이니까.

▼'일탈의 신용장'을 받아들여랴▼

그래도 기성세대는 “지금은 공부할 때”라고 ‘때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서울의 C고교의 김모교사(43)는 “아무리 디지털시대, 디지털시대라고 해도 대부분의 부모들은 이를 피부로 느끼지 못해 자녀의 진로문제를 놓고 갈등하는 경우가 많다”고 말했다.

‘컴퓨터 괴물’로 인해 ‘아이들다운 정서’를 잃을까 우려하는 눈길도 있다. 하물며 제 때 학교를 다니지 않는다면 그 나이에 학교에서 익힐 사회성이나 정서발달을 기르지 못한다고 걱정하기도 한다.

그러나 문화비평가 서동진박사(사회학)는 “디지털키드는 이미 어려서부터 학교 이외의 곳에서 친구를 사귀고 정보를 교환하며 나름대로의 정서를 가꾸고 있다”고 말한다. 과거처럼 나이에 따라 자동적으로 주어지던 발달과정과 정체성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정말 그들이 원하는 것을 선택해 얻어내고 있다는 것이다.

문제는 ‘내가 무엇을 원하는가’를 알아내는 능력이다. 그래서 전문가들은 어른들이 이젠 교육학자 파올로 프레이리가 주장한 ‘일탈의 신용장’을 받아들여야 할 때라고 조심스럽게 제안한다. 주류에서 벗어날 수 있는 용기, 즉 제도나 남들이 좋다는 것을 무조건 따르지 않으면서도 판단력을 갖춘 아이로 키울 수 있는 과감한 선택이 필요한 때가 지금이라는 이야기다.

<이나연기자> larosa@donga.com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