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민애의 시가 깃든 삶]<149>한낮에

  • 동아일보
  • 입력 2018년 6월 30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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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낮에―이철균(1927∼1987)

영(嶺) 넘어
구름이 가고

먼 마을 호박잎에
지나가는 빗소리

나비는 빈 마당 한 구석
조으는 꽃에

울 너머
바다를 잊어

흐르는 천년이
환한 그늘 속 한낮이었다


이철균 시인에게는 단 하나의 시집만 있다. 시인 생전에는 그 시집마저 없었고, 돌아간 이후 문단의 동료들이 유고시집으로 만들었다. 평생 독신이었고, 떠돌이였다. 살림도 건강도 가난해서 의지할 곳이 시밖에 없었다고 전해져 온다. 원래 시인은 외로움과 쓸쓸함의 친구라지만, 그중에서도 이철균 시인은 매우 외롭고 쓸쓸했던 시인이었다. 지금도 그를 기억하는 지면은 많지 않고, 이제는 그를 기억하는 사람들도 많이 남지 않았다.

그런데 생애에 관한 기록만 읽고 이 시인을 안쓰러워해서는 안 된다. 그의 시를 읽고 나면 생각이 바뀐다. 눈앞의 생활이 풍족하지 않았다지만 시인에게 그것이 대수일까. 이 시인의 작품 세계는 저렇게나 아름다운데 말이다.

작품 속에서 한낮의 시간은 평화롭다. 구름은 한가로이 고개를 넘어가고, 호박잎과 나비와 꽃과 비가 시인의 풍경을 채운다. 시인은 이 모든 것을 조용히 듣고, 보고 있다. 한낮의 세계가 마음 안으로 꽉 차게 들어왔다. 시인의 마음이 벅차지 않을 리 없다.

이철균 시인은 감꽃 시인이라는 별명답게 서정적이고 아름다운 시를 썼다. 승승장구하지 않았어도, 풍족하지 않았어도 나는 이 시인이 분명 행복했다고 생각한다. 저런 한낮을 보았고 살았던 사람이다. 우리 삶의 목표가 충만함이라면 외롭고 쓸쓸한 한 시인은 분명 성공했다.

나민애 문학평론가
#한낮에#이철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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