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은철의 스토리와 치유]〈34〉비통한 마음 담긴 ‘곡자’

  • 동아일보
  • 입력 2018년 4월 18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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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은 상처를 안으로 가둬 다독이는 묘한 속성을 갖고 있다. 자기만의 형식, 즉 일종의 질서를 갖고 삶이 가진 무질서에 대응하기에 가능한 일이다. 문학, 그림, 음악, 조각, 무용 등은 형식의 예술이어서 삶의 혼란과 소용돌이, 상처를 그 형식 안에 가둔다. 그러다 보면 휘청거리는 삶도, 넘치는 고통도 조금은 견딜 만한 것이 된다. 예술이 가진 기능 중에서, 불완전하긴 하지만 그나마 유용한 기능이다. 난설헌 허초희의 시 ‘곡자(哭子)’는 좋은 예이다.

“작년에는 사랑하는 딸을 잃고/올해는 사랑하는 아들을 잃었다”라는 시구로 시작하는 ‘곡자’는 자식들을 차례로 잃은 난설헌의 비통한 마음이 담긴 한시다. 자식을 하나도 아니고 둘이나 잃은 어머니의 심정이 오죽했으랴. 그 무엇으로도, 그 어떤 말로도 위로가 되지 않는 절망감이었으리라. 놀라운 것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난설헌이, 5개의 한자로 이뤄진 14행의 정형시에 자신의 복잡한 심사를 담았다는 사실이다. 그러면서 감당할 수 없는 감정의 소용돌이, 즉 무질서가 언어의 형식, 즉 질서로 바뀌었다.

그렇다고 자식을 잃은 슬픔과 절망이 사라진 것도 아니고 애도의 마음이 약해졌을 리도 없지만, 그래도 현실을 응시하게 되면서, 자기 안에 들어선 또 다른 “배 속의 아이가/제대로 자랄 수 있을지” 염려할 수 있게 되었다. 이것이 ‘곡자’의 핵심이다.

그러나 깊은 상처를 가진 모든 사람이 난설헌처럼 언어의 질서로 자신의 감정을 풀어낼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이 세상에는 자신의 상처를 어떤 것으로도 풀어내지 못하고 그것이 몰고 온 소용돌이에 속수무책으로 휘말리는 수많은 사람이 있다. 바다에 자식을 잃어 자신의 삶을 저당 잡힌 부모들도 있다. 그렇다면 누군가는 그들 대신 말하고 그들의 상처를 다독이고 때로는 같이 울어주면서, 삶을 견딜 만한 것으로 만들어줘야 한다. 프랑스 철학자 레비나스가 말한 “타자의 눈물”을 헤아리는 것, 이것이 예술의 윤리다.
 
왕은철 문학평론가·전북대 교수
#난설헌#허초희#곡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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