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7년 오늘(10월 27일) 정부는 개헌 찬반 여부를 묻는 국민투표를 실시했다. 이 투표에는 유권자 72.2%가 참가해 그 중 93.1%가 찬성표를 던졌다. 이날 국민투표를 통과한 헌법이 바로 지금까지 우리가 쓰는 ‘대한민국 제6공화국’ 헌법이다.
이 제9차 개헌 핵심 뼈대는 ‘대통령 직선제 도입’이었다. 동아일보는 ‘직선제 헌법(直選制 憲法) 확정’이라는 제목으로 투표 결과를 보도하면서 대통령 선거를 12월 15일 진행하기로 했다는 소식을 함께 전했다. 그만큼 대통령 직선제에 대한 국민들 열망이 컸다. 대통령 직선제야 말로 민주화의 표상이었기 때문이다.
●민주화로 가는 길
1987년은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과 함께 시작한 해였다. 당시 서울대 언어학과 3학년이던 박종철 열사는 경찰에 끌려가 서울 용산구 남영동 대공분실에서 물고문을 당해 1월 14일 숨졌다. 하지만 당시 치안본부(현 경찰청)는 이튿날 “책상을 탁! 치니까 억! 하고 죽었다”고 발표했다.
이 해명을 받아들일 수 없던 동아일보는 그달 16일 처음으로 고문이 있었을지 모른다는 우려를 제기했다. 이튿날에는 ‘외상의 흔적은 발견할 수 없었고 복부 팽만이 심했으며 폐에서 수포음(거품 소리)이 전체적으로 들렸다’는 검안서 내용을 보도했다. 이 특종 보도로 치안본부는 ‘경관 두 명의 물고문으로 숨졌다’고 털어놓았다.
이후 동아일보는 그해 5월 22일 ‘치안본부 고위 간부들이 비밀회의를 열어 범인 축소, 사건 은폐 조작을 모의했다’, 다음날에는 ‘축소·은폐 조작을 법무부와 검찰 고위 관계자들이 이미 알고 있었다’고 잇달아 특종 보도를 내보냈다.
이 여파로 정부는 그달 26일 국무총리, 국가안전기획부장(현 국가정보원장), 내무부 장관(현 행정자치부 장관), 법무부 장관, 검찰총장 등을 모두 바꾸는 개각을 단행했지만 사회적 분노는 쉽게 사그라들지 않았다. 데모가 잇따르는 가운데 그해 6월 9일 이한열 열사(당시 연세대 경영학과 2년)가 경찰 최루탄에 맞아 결국 숨지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튿날 시청 앞은 ‘호헌철폐’, ‘독재타도’를 외치는 시민들로 가득 찼다(6·10 민주항쟁).
여기서 호헌(護憲)은 사전적으로 “헌법을 보호하여 지킨다”(국립국어원 표준국어대사전)는 뜻. 하지만 여기서는 전두환 전 대통령이 그해 4월 13일 ‘개헌 논의를 중단한다’고 발표한 담화 내용을 가리킨다.
민주화 열기에 위축된 여당(민주정의당)은 결국 백기를 들었다. 노태우 당시 민정당 대표위원(제13대 대통령)은 그해 6월 29일 서울 송파구 가락동 당사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대통령 직선제 개헌을 뼈대로 한 개헌 방향을 전 전 대통령에게 제안한다(6·29 선언).
이튿날 전 전 대통령이 이 제안을 받아들이면서 개헌 찬반을 묻는 국민투표를 진행하게 됐다. 결국 새 헌법안이 통과되면서 대한민국 국민은 1972년 이후 15년 만에 다시 자기 손으로 대통령을 선출할 권리를 얻게 됐다. ● 대통령 간선제와 직선제
이승만 박사를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으로 만든 건 국회였다. 제헌헌법은 대통령을 간선제로 뽑도록 규정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후 ‘발췌개헌’을 통해 대선 방식이 직선제로 바뀌면서, 1952년 8월 5일 대한민국 국민은 처음으로 국민투표를 통해 대통령을 뽑게 됐다.
1960년 4·19 혁명으로 이 전 대통령이 물러난 뒤 정부 형태가 의원내각제로 바뀌면서 대선 방식도 국회 간선제로 바뀌었다. 이듬해 5·16군사정변으로 정권을 잡은 박정희 정권은 대통령중심제로 복귀하면서 다시 대통령 직선제를 도입한다.
1971년 대선 승리로 3연임에 성공한 박 전 대통령은 1972년 ‘유신헌법(제4공화국 헌법)’을 통해 대선 방식을 간선제로 바꿨다. 유신헌법 제45조①은 ‘대통령의 임기가 만료되는 때에는 통일주체국민회의는 늦어도 임기만료 30일전에 후임자를 선거한다’고 돼 있었다.
최규하, 전두환 전 대통령 역시 이 통일주체국민회의를 통해 대통령 자리에 앉았다. 문제는 통일주체국민회의라는 이 헌법 기구가 이름과 달리 통일을 목적으로 하지도 않았고, 주체적이지도 않았으며, 회의도 아니었다는 점. 이 기구는 그저 대통령이 ‘투표 형식’을 빌리기 위한 ‘거수기’에 지나지 않았다.
통일주체국민회의는 제5공화국 헌법 도입과 함께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하지만 그렇다고 대의원이 대통령을 뽑는 방식이 달라진 건 아니었다. 이날 국민투표에서 개헌안이 통과되면서 비로소 대통령 직선제가 뿌리내리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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