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은철의 스토리와 치유]<2> 밀양, 그 비밀스러운 햇볕

  • 동아일보
  • 입력 2017년 8월 30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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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을 보호해주는 피부처럼, 마음에도 일종의 보호막이 있다. 그 보호막에 해당하는 것이 어떤 것을 자각하는 우리의 의식이다. 의식은 다가오는 것들에 마음의 준비를 하게 한다. 이것이 여간해서는 심각한 상처가 생기지 않는 이유다. 그런데 엄청난 사건이 발생하면 그 보호막이 속수무책으로 뚫린다. 그리고 안으로 들어간 상처는 무의식 속에 자리를 잡는다. 프로이트의 말이다.

그렇다. 깊은 상처는 보호막을 뚫고 깊숙한 곳으로 들어간다. 그때부터 상처가 삶의 주도권을 쥔다. 이창동 감독의 ‘밀양’은 그러한 상처에 대한 깊은 성찰을 담고 있다. 주인공은 아들을 잃은 어머니다. 가해자는 그녀의 아들이 다니던 웅변학원 원장이다. 그가 돈을 노리고 아이를 유괴해 죽인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아이가 갑자기 죽었으니, 보호막이 제대로 작동할 리가 없다. 트라우마가 발생하고, 그것에 휘둘리는 삶이 시작된다. 겉으로는 사람들의 권유로 교회에 나가면서 마음의 상처가 나은 것처럼 보이지만, 상처는 잠시 숨을 고르고 있을 뿐이다. 그녀는 아들을 유괴해 죽인 살인자를 용서하겠다며 면회까지 가지만, 그와의 대면에서 모든 것이 허망한 것이었음이 드러난다.

용서는 생각뿐이었던 것이다. 용서를 입에 올리는 가해자 앞에서 용서할 마음은 사라지고 만다. 상처에 점령된 그녀의 마음에는 타인을 용서할 여유가 애초에 없었다. 스토리가 주는 교훈은 여기에 있다. 상처는 그리 호락호락하게 낫는 게 아니라는 것. 용서라는 목적을 향해 돌진하는 게 능사가 아니라는 것. 그리고 용서는 자기 안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고 타자와의 관계에서 생성된다는 것.

그럼에도 영화는 그렇게 절망적이지 않다. 원작인 이청준 작가의 소설 ‘벌레이야기’에서 주인공이 절망하며 자신의 목숨을 버리는 것과 달리, 영화는 신애가 병원에서 나와 길게 자란 자신의 머리를 마당에서 자르는 장면에서 끝난다. 머리를 손질한다는 것은 삶에 대한 의지가 조금은 남아 있다는 의미다. 어쩌면 그것은 그녀를 위해 거울을 잡아주는 이웃의 몸짓이 있기에 가능한 것일 수 있다.

그 이웃의 몸짓이 바로 상처에 필요한 밀양(密陽), 즉 ‘비밀스러운 햇볕’이다. 그래서 영화는 마당에 내리쬐는 햇볕을 비추며, 신애의 것처럼 깊은 상처도 그런 햇볕이 있으면 언젠가 견딜 만한 것이 될 수 있음을 암시한다. 햇볕을 비추는 카메라가 흔들리는 것으로 보아 그 미래는 아직 불안정하고 불확실하지만, 그래도 희망은 있다. 맞다. 고통 속의 삶을 견딜 만한 것으로 만드는 게 우선이다. 그리고 용서는 기다림의 영역이다.
 
왕은철 문학평론가·전북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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