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설위원이 만난 사람/홍수용]“진보정부의 개혁 조급증… 일관성 없으면 사회적 합의 어렵다”

  • 동아일보
  • 입력 2017년 7월 10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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前경제부총리 이헌재

이헌재 전 경제부총리는 점진적 개혁을 옹호하는 시장주의자다. 그는 문재인 정부가 당장의 성과에만 매달리면 저항세력이 생기고 나중에는 개혁피로증후군에 시달릴 수 있다고 우려했다. 장승윤 기자 tomato99@donga.com
이헌재 전 경제부총리는 점진적 개혁을 옹호하는 시장주의자다. 그는 문재인 정부가 당장의 성과에만 매달리면 저항세력이 생기고 나중에는 개혁피로증후군에 시달릴 수 있다고 우려했다. 장승윤 기자 tomato99@donga.com
홍수용 논설위원
홍수용 논설위원
《 이헌재 전 경제부총리는 김대중 정부와 노무현 정부에서 경제팀 수장을 지냈다. 이 때문에 진보의 이미지가 짙지만 본인은 자신의 이념적 토대가 ‘개혁적 보수’라고 했다. 실제 그는 노무현 정부 당시 386세대 정권 실세에 대해 “정치적 암흑기에 저항운동을 하느라 경제하는 법을 제대로 배우지 못했다”고 직격탄을 날렸던 시장주의자다. 7일 오후 서울 종로구 적선동 사무실에서 그를 만났다. 》
 
―보수의 가치가 무너지고 있다.

“낯설게 들리겠지만 새마을운동의 정신인 근면 자조 협동 안에 보수와 진보의 가치가 모두 들어 있다. 사지 멀쩡하다면 내 힘으로 뭐든 하겠다는 근면 자조가 보수의 핵심 가치인 반면 협동은 진보의 뼈대를 이룬다. 정치 세력으로서 보수는 없어져도 인간 본성 측면에서 보수는 없어지지 않는다.”

보수는 죽지 않는다

―문재인 정부 출범 2개월째다. 정책 기조가 진보 쪽으로 쏠리는 것은 아닌가.

“촛불집회에 나온 사람들이 모두 진보주의자, 좌파는 아니었다. 이 점을 생각해야 한다. 헌법 1조는 우리나라를 민주공화국이라고 규정한다. 민주는 대중적 참여를, 공화는 그 참여를 받아들인 통치 구조를 말한다. 이 통치 구조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았기 때문에 대중이 움직였다. 정파적 이익을 대변한 게 아니라 사라진 공화주의를 되살려 놓으라는 명령이었다. 그런데 진보정부가 촛불이 자신들을 위해 움직였다고 일방적으로 해석하기 시작한다면 거기서 문제가 생긴다.”

점진적 개혁의 중요성을 강조할 때 종종 등장하는 ‘작은 칼을 이용한 정교한 외과수술’이라는 비유는 이 전 부총리의 전매특허다. 정부는 시장을 망치는 장난꾼만 콕 집어내면 되고 나머지는 모두 시장에 맡기라는 것이다.

―이른바 진보 진영의 특성상 현 정부의 급진적 개혁은 어느 정도 불가피하지 않나.

“문제의 원인이 어디서 시작됐는지 잘 봐야 한다. 시장경제 때문에 경제가 잘못되고 있다고 인식한다면 정부 개입이 강해질 것이다. 그러나 시장이 문제가 아니라 1970, 80년대 압축적 성장기를 거친 과거의 특수한 상황과 최근 글로벌 기술 개발 흐름이 맞물리면서 부작용이 생기고 있다고 인식한다면 개혁의 방식도 달라질 수 있다. 당장의 성과에 매달려 조급증을 내면 저항세력이 생기고 개혁피로증후군이 나타날 것이다.”

그는 최근 경유세 인상 논란 등 정책이 혼선을 빚고 있는 것도 문제 인식의 차이 때문이라고 했다. 개혁을 조기에 궤도에 올려놔야 한다는 조급증이 겹쳤다는 것이다. 개혁은 양면성이 있어서 총론에는 찬성해도 각론에서 이견이 생길 수밖에 없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다. 특히 정부 출범 후 여론 수렴 과정에서 개혁의 속도를 조절해야 하는데 정권 내부 갈등이 커지는 ‘동지 간의 투쟁’이 벌어지면 문제가 더 복잡해질 것이라고 진단했다.

사드 공론화 필요, 원전은 불필요?

―원자력발전소 폐기 문제에서 갈등 조짐이 나타나고 있다.

“갈등 구조를 해결하는 절차에 대한 고민이 없다는 게 문제다. 현 정부는 원전 폐기는 소수의 주장에 의존한 반면 사드(THAAD·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 도입은 공론화의 과정이 필요하다고 했다. 자기모순에 빠진 셈이다. 사회적 갈등을 해결하는 과정을 거쳐 결론을 내고, 그 결론에는 사회가 따르기로 한다는 합의와 질서가 구축돼야 한다. 정부 스스로 앞뒤가 맞지 않는 말을 한다면 국민들이 사회적 합의를 존중하기 어려워진다.”

―여론은 존중돼야 하지만 리더라면 과감한 결단도 필요한데….

“우리 사회의 양극단에는 자기가 옳다고 믿는 것을 밀어붙이는 교조주의와 국민이 원하는 대로 해야 한다는 포퓰리즘이 있다. 토론을 통해 문제점을 드러낸 뒤 절충점을 찾아야 한다.”

―교육 문제에 대한 해법을 제안한다면….

“물고기를 강하게 만들려면 물속에 메기를 풀면 된다. 다른 물고기들이 긴장해서 강건해진다. 메기를 죽이면 나머지 고기는 다시 예전으로 돌아간다. 자사고 등 수월성 교육기관을 없앤다고 국민들이 질 좋은 교육을 받게 되는지 의문이다. 자사고 폐지로 일부 사람들에게 만족감을 줄 수는 있겠지만 교육의 질이 높아지는 게 아니다. 공교육의 질을 자사고 외고 수준으로 높이는 게 우선과제 아닌가.”

수월성 교육이라는 메기를 살려두고 공교육의 질을 높이는 작업은 막대한 재정이 들 뿐 아니라 하나의 정권이 끝나기 전에는 그 효과가 나오지도 않는다. 문제 해결의 방법만이 아니라 결과까지 확인하겠다는 무리수가 일을 그르칠 수 있다.

―전망기관들이 한국 성장률 전망치를 높이고 있다. 경제가 좋아진 것인가.

“성장률 3% 목표를 이룬다고 뭐가 달라지나. 이미 있는 생산시설의 가동률을 높여서 수출을 늘린다 해도 우리 경제 내부에서 뭔가를 새로 만드는 게 아니다. 환율과 글로벌 경기라는 대외변수 덕에 생기는 결과일 뿐이다. 질 좋은 일자리를 늘려야 한다.”

정규직-임시직 따질 필요 없다

―무엇이 질 좋은 일자리인지 모르겠다.


“하다 보면 만들어지는 것이다. 이런저런 것이 양질이라고 규정하는 방식 자체가 위에서 찍어주는 옛날식 사고다. 일에 기여한 만큼 보상을 준다는 기준, 동일노동 동일임금 원칙에 따라 변화를 수용하는 능력만 키운다면 다양한 일자리가 늘어날 수 있다. 정규직 임시직을 따질 필요는 없다.”

―공공 부문이 민간 일자리의 마중물 역할을 하겠다는 것이 정부 정책인데….

“첫째, 개념이 불투명하다. 예를 들어 소방관이 실제 얼마나 필요한지, 어떤 방식으로 늘려야 하는지 모호하다. 둘째, 정책 자체가 가능하지 않다. 첫해에 공무원 10만 명을 뽑는다고 치자. 이 사람들을 정년까지 책임져야 하는 상황에서 다음 해에 또 10만 명을 뽑을 수 있나.”

―기득권 철폐에 이견이 없다. 그러나 크고 작은 기득권이 많다. 우리가 용인할 수 있는 기득권, 뿌리 뽑아야 하는 기득권이 따로 있나.

“기득권은 말 그대로 이미 주어진 것이다. 현재 있는 걸 뺏는 방식은 소모전이다. 예를 들어 A라는 프랜차이즈 카페와 B라는 대형 카페가 한 동네에 있다고 하자. 프랜차이즈 갑질을 단속한다고 A를 없애면 이득을 보는 쪽은 동네 소형 카페가 아니라 대형 카페 B다. 다른 기득권을 보호하는 결과를 낳는다. 현재 정규직의 기득권은 인정해주고 새로 직원을 뽑을 때 사회보장이 잘되는 계약직 형태로 뽑는 식은 어떤가. 그러면 시차를 두고 기존 기득권이 소멸되는 자연스러운 개혁이 가능해질 것이다.”

―4차 산업혁명 시대, 우리는 할 일을 하고 있나.

“지금까지 우리는 산업사회의 대량생산과 종신고용 체제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그 체제로는 우리 경제가 올라갈 수 있는 꼭짓점에 이미 왔다. 이제는 창조적이고 소프트한 가치가 얹어져야 한다. 그러기에는 지금 우리의 서비스 생산성이 너무 낮다.”

―서비스업 육성 주장을 지겹도록 했지만 늘 제자리다.

“개념이 포괄적인 서비스라는 말 대신 소프트 비즈니스라는 개념으로 대체할 것을 제안한다. 정부가 요식업자라는 울타리를 쳐주면 업자가 그것을 권리로 여기는 풍토에서 발전을 기대하기는 어렵다.”

정부 과보호가 좀비기업 양산

―현재 시급한 구조개혁 과제는 무엇인가.

“전 세계적으로 노동의 유연성을 높이는 것이다. 그뿐 아니라 노동의 창의성을 높이는 것도 중요하다. 우리 금융을 보라. 문제 터질까 봐 방어적인 정책만 쓰고 있다. 중국은 알리페이로 날고 있는데 우리 금융은 아직도 과거에 매여 기어가고 있다. 정부가 금융을 과보호한 결과 부실기업이 과보호되는 부작용을 초래했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재협상을 계속 요구하고 있다.

“저쪽이 강하게 요구하면 검토할 수밖에 없다. 국민과 국가 간에는 법치가 존재하지만 국가 간에는 어디까지나 협의일 뿐이다. 트럼프가 자국민을 상대로 정치적 게임을 하는 일환으로 한미 FTA를 들고나왔다면 우리는 무역보복을 당하는 것보다 대화하면서 시간을 버는 것이 낫다.”

이 전 부총리는 북한 대륙간탄도미사일(ICBM)급 미사일 발사 실험도 북한 주도의 ‘카드 게임’이라고 본다. 북한으로서는 가진 게 핵과 중국뿐이니 벼랑 끝 전술을 하면서 ‘내 카드를 사라’는 무언의 압력을 넣고 있다는 것이다. 그 카드를 사는 것이 가능할까. 이 전 부총리는 결국 미국의 결정에 달린 문제라고 해석했다.

―노무현 정부 당시 경제부총리였다. 후회는 없는지….

“종부세(종합부동산세)를 처음 설계한 대로 점진적 과세 방식으로 갔다면 지금쯤 시장 안정화에 기여했을 것이다. 내가 나간 뒤 2005년 8·31부동산대책 때 너무 강화하는 바람에 결국 폐지됐다. 경제자유구역과 기업도시 모델이 정착되지 못한 점도 아쉽다.”

기업도시 정책이 실패한 것을 교훈 삼아 문재인 정부가 구상 중인 정책이 도시재생 모델이다. 지역별로 주민들의 의견을 수렴해 죽어가는 도시의 기능을 살리고 도시건설 프로젝트의 노하우를 수출하자는 것이다. 시멘트 철근으로 아파트 재건축을 하는 게 아니라 지능형 에너지 공급체계, 상하수도 배치, 소유구조, 임대구조를 주민 참여로 구상하는 과정에서 일자리를 만들 수 있다고 본다. 다만 서울시의 공중산책로 ‘서울로 7017’처럼 외국의 모델을 흉내 내는 방식으로는 국가 경쟁력까지 기대하기는 어렵다는 게 그의 생각이다.

국가의 존재 이유를 물었다.

“국가안보, 치안안보, 경제안보 등 3대 안보에 전력을 다하라고 국가가 있는 것이다. 경제는 정파가 아닌 국민에게 의미가 있는 국민경제가 돼야 한다. 그렇지 않은 경제는 도시경제, 제국경제일 뿐이다.”
 
홍수용 논설위원 legman@donga.com
#좀비기업#진보개혁 조급증#문재인 정부#4차 산업혁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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