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경구의 옛글에 비추다]도둑에게도 배울 점이…

  • 동아일보
  • 입력 2017년 6월 13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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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경구 한국고전번역원 선임연구원
조경구 한국고전번역원 선임연구원
계묘년(1903년) 겨울에 도둑 떼가 크게 일어나 해를 넘기면서 더욱 극성을 부렸다. 떼를 지어 마을에 들어와서는 대낮에 불을 지르고 재물을 약탈하는가 하면, 한두 놈이 기회를 틈타 쳐들어 와서 재물을 빼앗아 가기도 하였지만, 누구도 감히 항변하지 못했다.

한번은 도둑 떼가 칼을 들고 사촌 아우의 집에 쳐들어왔다. 아무리 뒤져도 돈이 나오지 않자 물러가다가 휙 돌아보며 말하기를 “집이 왜 이렇게 크냐? 좀 줄여야겠다” 하였다. 어떤 도둑은 밤에 술이 취해 족제(族弟)의 집에 들어와 돈을 뒤지다가 잠이 들었는데, 자다가 자리에 가득 토악질을 해 놓으니 고약한 냄새가 코를 찔렀다. 다음 날 날이 밝자 일어나서 사과하기를 “술에 취해서 예의를 잃고 주인에게 많은 폐를 끼쳤습니다. 부디 주인께서는 인심을 잃지 마십시오” 하였다. 또 어떤 도둑은 노름하는 사람들에게 “무익한 짓이다. 하지 마라” 하였다.

구한말의 독립운동가 수당(修堂) 이남규(李南珪·1855∼1907) 선생의 ‘도둑 이야기(盜說)’입니다. 떼로 몰려다니며 도둑질하는 주제에 ‘취해서 실례가 많았다’ ‘집을 줄여라’ ‘노름은 하지 마라’ 등의 사과와 충고를 했다니 그만 헛웃음이 납니다. 이 소식을 전해들은 수당 선생의 말씀입니다.

도둑이란 사람을 잘 선도하는 자가 아니며, 그 마음씨 또한 사람을 사랑하는 자가 아니다. 그런데 그들이 한 말을 보면 사람을 사랑하고 선도하는 자라 할지라도 이보다 더 잘할 수가 없다. 도둑의 말이라 하여 이를 다 버리지 말고 그중 쓸 만한 것을 고른다면, 이 또한 옥돌을 다듬는 타산지석(他山之石)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또 도둑인 주제에 이처럼 실례를 범한 것을 뉘우치기도 하고 노름을 미워하기도 하는 것을 보면, 그 양심이 아직 다 사라진 것은 아니라 하겠다. 윗자리에 있는 사람들이 이들에게 예와 의로 가르쳐서 권하고, 추위와 굶주림에 쫓기는 일이 없도록 해 준다면, 이들 또한 바른 도리를 지키고 실천할 수 있는 자들이 될 것이다(上之人有以禮義之敎申之, 而無迫於飢寒, 亦直道而行者也歟).

도둑질은 할지언정 일말의 양심이 남아 있어 개선될 수 있는 도둑이라면, 부끄러움도 모르고 거짓으로 일관하며 끝까지 자신의 떳떳함을 강변하는 도둑과는 아무래도 종류가 좀 다르지 싶습니다.

조경구 한국고전번역원 선임연구원
#도둑#이남규#도둑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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