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용 기자의 글로벌 이슈&]미국의 일자리전쟁… 100년 기업도 안전하지 않다

  • 동아일보
  • 입력 2017년 4월 17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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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캘리포니아 주 팰로앨토 시내 스탠퍼드 쇼핑센터에 등장한 감시용 보안로봇 K5. 지난해 7월 아이와 부딪히는 사고가 발생해 사용이 중단됐다
미국 캘리포니아 주 팰로앨토 시내 스탠퍼드 쇼핑센터에 등장한 감시용 보안로봇 K5. 지난해 7월 아이와 부딪히는 사고가 발생해 사용이 중단됐다
박용 기자
박용 기자
다음 달 5일 스위스 장크트갈렌에서 세계 지도자 600여 명과 젊은 대학생 대표 200여 명이 모여 미래 화두를 논의하는 ‘장크트갈렌 심포지엄’이 열린다. 47회째 열리는 이 행사의 올해 주제가 의미심장하다. ‘파괴의 딜레마(The dilemma of disruption).’ 이 심포지엄에 초청된 미국 실리콘밸리 인공지능(AI) 회사인 AI브레인의 신홍식 박사는 “4차 산업혁명 등 기술 혁신이 바꾸는 기업 생태계와 이런 파괴적 변화에서 살아남아야 하는 기존 기업의 딜레마 등이 집중적으로 논의될 것”이라고 소개했다.

대를 이어 생존하는 ‘100년 기업’이 되려면 100년 넘게 갈 수 있는 사업을 잡아야 하고, 시대 변화에 민첩하게 적응할 수 있어야 한다. 그렇게 20세기를 살아온 글로벌 100년 기업들조차 요즘은 앞이 캄캄하다. 2000년 이후 포브스 500대 기업의 절반이 문을 닫았다. 10년 전 문을 연 애플 앱스토어의 애플리케이션(앱)은 500여 개에 불과했지만 이젠 200만여 개, 다운로드만 1300억 회나 된다. 게릴라와 같은 앱들은 전통 기업의 사업과 일자리를 잠식해 나가고 있다. 쓰나미(지진해일) 같은 파괴적 혁신의 물결 앞에선 어떤 기업도, 어떤 일자리도 안전하지 않다.

이런 변화를 제대로 경험하려면 책 냄새 풀풀 나는 미 실리콘밸리의 스탠퍼드대 연구실보다 돈이 팽팽 돌아가는 바로 옆 쇼핑센터를 방문하는 것이 더 낫다. 실리콘밸리 부자들이 즐겨 찾는 스탠퍼드 쇼핑센터는 실외형 대형 쇼핑몰이다. 노드스트롬, 니먼마커스, 메이시스, 블루밍데일 등 이름을 대면 알 만한 유명 백화점과 루이뷔통, 버버리, 토리버치, 애버크롬비, 갭, 앤트로폴로지, 어번아웃피터스 등 140개 브랜드의 로드숍이 들어서 있다. 현대백화점이 최근 국내에 들여오기로 한 주방용품과 가구 인테리어 전문점인 윌리엄스 소노마도 이곳에 있다.

매장 구성은 수시로 바뀐다. 가장 ‘핫’한 기업이 치고 들어오기 때문이다. 지난해 일본 가전브랜드 소니의 대형 매장이 문을 닫고, 그 자리에 14년 전 실리콘밸리에서 출발한 전기자동차 회사 ‘테슬라’ 전시장이 들어섰다. TV, 워크맨, CD플레이어 등 혁신적 제품으로 20세기를 휘어잡았던 72년 역사의 소니가 물러나고, 21세기 신생 기업이 노른자위 매장을 차지한 것이다.

테슬라는 10일 미 뉴욕증시에서 제너럴모터스(GM)를 제치고 자동차 업계 시가총액 1위 기업에 등극했다. 거품 논란이 있지만 투자자들은 테슬라의 성장 가능성이 109년 역사의 미국 최대 자동차 회사인 GM보다 크다고 본 것이다. 테슬라 창업자인 일론 머스크는 19세기 교류 발전기 등을 발명한 니콜라 테슬라에서 회사 이름을 따왔다. 가정 등에서 쓰이는 교류 전기로 충전하는 전기차라는 상징성을 이름에 담은 것이다.

테슬라 같은 스타트업의 약진과 전통 기업의 퇴장은 세계 곳곳에서 벌어진다. 5일 월스트리트저널(WSJ)에 따르면 제너럴일렉트릭(GE)이 가정용 전구 사업의 매각을 검토하고 있다고 한다. 19세기 후반 테슬라의 라이벌이었던 토머스 에디슨이 세운 에디슨전기회사에서 출발한 GE가 모태 사업인 전구 사업에서 손을 떼는 것이다. 테슬라가 한때 일했던 131년 역사의 미국 웨스팅하우스 일렉트릭스는 최근 대규모 손실을 내고 회사의 존립마저 위태롭다. 이 탓에 이 회사를 인수한 142년 역사의 일본 도시바도 생존의 기로에 섰다.

165년이 된 백화점의 역사도, ‘아메리칸 드림’의 소비문화를 대변하던 스탠퍼드 쇼핑센터 같은 교외형 쇼핑센터도 미래를 장담할 수 없다. 23년 전 시애틀에서 창업한 전자상거래 기업 아마존이 최근 무인 매장을 내며 오프라인 유통회사들을 위협하고 있기 때문이다.

달라진 세상은 기존 일자리를 없애고 새 직업을 만든다. 스탠퍼드 쇼핑센터에는 안내원 역할을 하는 달걀 모양의 초보적인 감시 로봇이 등장했다. 앞으로 고도의 로봇기술 등이 도입되면 세그웨이를 타고 쇼핑센터를 누비던 ‘몰캅’(쇼핑몰 보안요원)은 집에 가야 할지도 모른다. 로봇을 설계하고 개발하는 이들이 일자리를 잃은 몰캅의 수입을 가져갈 것이다.

대기업이 새로운 사업에서 성공하고, 새 기업이 기존 기업을 대체하는 기업 생태계와 청년들이 이런 변화에 적응하게 하는 교육 시스템이 없는 경제는 파괴적 혁신의 시대에 생존을 기약할 수 없다. 미래를 책임지겠다는 대선 후보들은 혁신의 딜레마를 극복할 비전이 있는가. 프랑스 문호 빅토르 위고는 ‘레미제라블’에서 이렇게 썼다. “아는 것이 없어, 배운 게 없어서 빵을 훔칠 수밖에 없다면, 그것은 교육을 시키지 않은 사회의 책임”이라고.
  
박용 기자 parky@donga.com
#장크트갈렌 심포지엄#감시용 보안로봇 k5#테슬라#100년 기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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