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진영 기자의 필담]“힘들지않은 세대는 없어… 희망의 끈 이어가는 게 중요”

  • 동아일보
  • 입력 2016년 9월 19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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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태웅 미 하와이대 로스쿨 교수 유엔 인권이사회 강제실종실무그룹 위원

백태웅 미국 하와이대 로스쿨 교수는 18년째 해외 생활을 하고 있지만 인터넷 덕분에 한국과의 심리적 거리감이 많이 좁혀졌다고 했다. 올 추석엔 미국 싱가포르 서울 포항에 흩어져 사는 가족이 ‘단체 톡’ 방식으로 함께 추도예배를 했다. 백 교수는 “고교(부산 동성고) 5년 선배인 한인섭 서울대 로스쿨 교수가 재미있다며 가르쳐줘서 페이스북도 한다. 교류하는 사람들 중엔 함께 운동했던 이들도 있고 아닌 이들도 있다. 스펙트럼이 넓다”고 했다. 김경제 기자 kjk5873@donga.com
백태웅 미국 하와이대 로스쿨 교수는 18년째 해외 생활을 하고 있지만 인터넷 덕분에 한국과의 심리적 거리감이 많이 좁혀졌다고 했다. 올 추석엔 미국 싱가포르 서울 포항에 흩어져 사는 가족이 ‘단체 톡’ 방식으로 함께 추도예배를 했다. 백 교수는 “고교(부산 동성고) 5년 선배인 한인섭 서울대 로스쿨 교수가 재미있다며 가르쳐줘서 페이스북도 한다. 교류하는 사람들 중엔 함께 운동했던 이들도 있고 아닌 이들도 있다. 스펙트럼이 넓다”고 했다. 김경제 기자 kjk5873@donga.com
이진영 기자
이진영 기자
박노해와 백태웅.

상고 출신 시인과 서울대 법대생은 한때 같은 길을 걸었다. ‘해방 후 최대 규모의 자생적 사회주의 혁명조직’이라는 사로맹(남한사회주의노동자동맹) 사건 주도자로 1991년 나란히 구속됐던 두 사람은 각각 무기징역과 15년 징역을 선고받았고, 1998년 광복절 특사로 풀려났다.

이후 둘의 길은 갈라진다. 박노해(58)가 시인 또는 사진작가로 제도권 밖에서 서성이는 동안 백태웅(53)은 미국 유학 4년 만인 2003년 캐나다 브리티시컬럼비아대 법대 교수로 임용됐다. 캐나다 최초의 한국인 법대 교수이자 북미 최초의 전임 한국법 교수였다. 2011년엔 하와이대로 옮겨갔다. 안경환 서울대 로스쿨 명예교수는 저서 ‘조영래 평전’에서 “백태웅의 성공은 개인적 성공인 동시에 한국 인권탄압의 역사가 국제사회에 진 부채이며 서울대 법대 출신이 한국 사회에 지고 있는 무거운 빚”이라고 했다. 민주화투쟁 경력과 학벌 덕을 봤다는 뜻이다.

그는 대학에서 국제인권법과 비교법을 강의하면서 지난해 7월부턴 유엔 인권이사회 강제실종실무그룹 위원으로 임명돼 세계 곳곳을 다니고 있다. ‘빚’을 갚으며 살고 있는 셈이다. 지난달 아시아인권포럼 참석차 서울을 찾은 백 교수를 만났다. 추석 연휴에 추가로 질문지를 보냈더니 유엔 강제실종실무그룹 회의를 위해 스위스 제네바로 가는 기내에서 답을 보내왔다.

운동권 출신서 법학교수로 변신

―세계 인권과 관련해 요즘 최대 이슈는 무엇인가.


“스리랑카 파키스탄 터키 등 여러 곳에서 터져 나오고 있어 하나만 거론하기 쉽지 않다. 인권 옹호자에 대한 탄압과 시리아 난민 문제도 심각하다. 이번 달엔 로드리고 두테르테 필리핀 대통령 치하에서 진행되고 있는 인권침해 상황과 강제실종 문제도 논의한다.”

유엔 강제실종실무그룹은 제네바 회의를 앞두고 지난해에만 37개국에서 766개의 강제실종 청원이 새로 접수됐다고 밝혔다. 강제 실종자 수는 증가 추세고, 유엔에 접수되는 사례는 빙산의 일각이라는 우려도 덧붙였다.

―북한과 관련해 접수된 사례도 있나.

“납북자 가족들이 강제실종 청원을 한다. 북쪽에서도 비슷한 청원을 한다. 어부가 풍랑으로 남한에 와서 안 돌아가겠다고 하는데 북한에선 강제실종이라며 찾아달라고 하는 거다.”

―북한 인권 문제가 심각하다.

“광범위한 인권 침해가 계속되고 있다. 하지만 변화도 일어나고 있다. 2009년부터 헌법에 인권이라는 규정을 넣고, 인권 보장에 관한 조항을 담아 형법과 형사소송법도 개정했다. 이제는 북한 때리기 식 인권 문제 제기가 아니라 인권 개선을 위한 구체적인 방법론을 찾아야 한다.”

―북한이 핵 도발의 수위를 높이고 있어 인권 이슈가 가려진 듯하다.

“북한을 핵보유국으로 인정할 수는 없지만 핵 협상은 즉시 시작해야 한다. 경제 개방을 하고 인권을 보장하고 주변국과 공존하는 길을 갈 수 있게 해줘야 핵 문제도 해결된다. 미국과 러시아가 냉전 후 수십 년이 지난 지금도 전략핵감축 협상을 이어가고 있듯이 북한과의 핵 대화도 오래 걸릴 수 있다.”

―미국이 대선을 앞두고 있는 것도 주요 변수다.

“미국은 특정 지역의 정책을 만들어서 강요하지 않는다. 해당 지역에서 내놓는 정책을 미국의 이익이 보장되는 방식으로 채택한다. 미국에 무엇을 해달라고 요구할지 우리가 결정해야 한다. 한국 언론이 미 싱크탱크 전문가들을 인용하곤 하는데 한국에서 신비화하는 것처럼 이들의 수준이 높지 않다. 한국 신문들 열심히 읽고 분석해서 얘기하는 거다.”

“아버지 세대는 ‘헬’에서 살았다”

백 교수는 출소 후 함께 노동운동을 하며 13년간 사귀어온 동갑내기 전경희 씨와 결혼하고 이듬해인 1999년 조국 서울대 로스쿨 교수(51)의 권유로 미국 노터데임대로 유학을 떠났다. 김광웅 전 서울대 행정대학원 교수는 유학비자를 받지 못하는 그를 위해 미 대사관을 찾아가 ‘보증’을 섰다. 사로맹 비서실장으로 3년형을 선고받았던 부인 전 씨는 미국공인회계사(AICPA)로 일하고 있다.

―6년 3개월 수감 생활에 수배 기간까지 합치면 13년간 갇혀 지냈다. 유학 준비는 언제 했나.

“감옥이 대학이었다. 영자신문을 포함해 신문 8, 9개를 다 읽었다. 원주에서 옥살이를 할 때 독방 사동에 마크라는 시카고 출신 미국인이 들어왔다. 세면하거나 운동하러 갈 때 말을 섞으면서 재판도 도와주고 장기도 두곤 했는데 그 몇 개월간 영어가 엄청 늘었다.”

―왜 사회주의자가 미국으로 공부하러 갔나.

“(답답한 듯 안경을 벗으며) 국가정보원은 나를 마르크스·레닌주의자라고 했지만 난 한 번도 나를 그런 틀로 규정한 적이 없다. 1980년대 운동권들이 생각했던 사회주의란 핍박받고 소외된 사람들이 사회의 주인이 되는 그런 체제를 위해 싸우는 개념이었다. 박제된 개념과 본질 사이엔 엄청난 괴리가 있다. 난 사회주의자인 동시에 자유주의자이다. 사람을 하나의 이념으로 규정하는 시대는 끝났다.”

―사로맹이라는 이름은 직접 지은 것 아닌가.

“그렇다. 박노해 씨와 둘이서 정했다. 1986년 4월 1일 밤에. 사회주의라는 표현을 쓰다 잡히면 사형당할 수 있다는 것도 알았다(그는 1심에서 사형 구형에 무기징역을 선고받았다). 그때는 극단적으로 표현하지 않으면 안 되는 극단적 좌절감이 있었다. 민주주의와 표현의 자유가 보장된 사회가 이렇게 빨리 올 거라고, 그래서 우리가 그 과실을 누릴 거라고 기대해 본 적이 없다. 그 과정에서 죽을 거라고 생각했다. 마르크스주의나 사회주의 같은 이념이 중요한 게 아니고 그걸 운동의 방편으로 생각했던 거다. 그래서 나보고 마르크스·레닌주의자냐고 묻는다면 난 아니라고 말한다.”

―민주화가 생각보다 빨리 이뤄졌다고?


“한국이 내놓을 수 있는 두 가지 상품이 단시간 내의 경제성장과 민주주의 및 인권신장인데 그것을 제대로 마케팅하지 못한다.”

―1980년대 20대들에겐 민주화를 이뤄냈다는 자부심도 있고, 경제 사정도 점차 나아졌다. 요즘 20대들은 ‘헬조선’이라는 말을 한다.

“그건 (다른 세대도) 마찬가지였다. 1950년대 전쟁을 치렀던 우리 아버지 세대는 진짜 ‘헬(지옥)’ 속에 살았다. 시대마다 다른 어젠다들이 있다. 사회 전체가 대처방안을 세워야 하고, 청년세대들 스스로 목소리를 내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지금 대학생이라면 무엇을 하겠는가.

“희망을 만들기 위해 뭔가를 하고 있을 거다. 문제가 있으면 그걸 해결할 노력은 나오기 마련이고, 노력하는 이들이 있으면 문제는 해결된다. 단, 감옥엔 안 갔으면 좋겠다. 선배들은 내게 학교 가지 말고 지하에서 다른 책 읽으라고 했다. 지금의 내가 그때(1980년대) 학생들 곁에 있었다면 효과적으로 운동할 수 있는 길을 제시할 수 있었을 것이다.”

―법 테두리 내에서?

“아니, 법 테두리조차도 끌어안아 우리 것으로 만들어 내면서 그걸 넘어서는.”

“진영 논리는 반(反) 지성적”


그는 육군 장교였던 부친의 근무지인 경기 파주에서 태어나 부산에서 초중고교를 다녔다. 선거 때마다 좌우 양쪽에서 PK(부산경남)의 기대주로 거론된다. 하지만 “기존 체제에 들어가 할 수 있는 일들이 별로 없다”며 출마할 생각이 없다고 일축했다.

―한국 정치권에 실망해서인가.


“운동권 경험을 가진 정치인들이 과거의 활동을 현재와 연결시키면서 과거와 현재를 뛰어넘는 미래의 비전을 만들었으면 좋겠다. 밖에서 볼 때 아직도 과거의 틀과 시야에 머물러 있다. 정치적 어젠다 수준이 낮다. 우린 서로를 고양시키지 못한다. 정치는 이전투구(泥田鬪狗)로 느껴지고, 변화를 위한 기획들이 안 보인다. 대통령 후보가 누가 되느냐는 얘기는 많지만 어떤 대통령이 무엇을 해주길 바라는지에 대한 논의는 없다.”

―이념 양극화가 심각하다. 영화도 보수는 ‘인천상륙작전’, 진보는 ‘부산행’으로 나누어 본다.

“한국의 이념 논쟁 수준이 저열해지고 있다. 진영 논리 자체가 지성과는 가장 거리가 먼 것이다. 운동이란 생각이 같은 사람들끼리만 하는 게 아니다. 80년대 운동이라는 것도 자기와 생각이 다른 세대조차 그 어젠다를 받아들이지 않으면 안 되는 설득력이 있어 변화의 힘이 생긴 것이다.”

―80년대 운동권들은 대부분 반미주의자들이었다. 미국에서 살면서 미국에 대한 생각이 바뀌었나.

“미국이라는 나라를 여러 요소로 나눠 볼 수 있는 눈이 생겼다. 미국과 한국의 관계도 다면적이어야 한다. 안보를 위해 경제를 희생한다거나, 미국이냐 중국이냐를 선택해야 한다는 등의 접근 자체가 미국을 잘 모르니까 나오는 얘기다. 미국은 냉전을 대체할 새로운 평화와 협력의 질서를 만들지 못하고 있다. 세계질서에 대한 이해 수준이 미국은 너무 낮다.”

―인권 전문가로서 계획은….

“아시아는 세계에서 유일하게 지역 전체를 아우르는 인권 법원이 없다. 아시아 인권규약 초안을 만드는 활동으로 첫 단추를 끼워 보려 한다. 광주에서 선포된 아시아인권헌장이 20주년을 맞는 2018년까지 아시아가 인권 차원에서 공유할 수 있는 가치를 담은 초안을 만들고 싶다.”

―당신은 실패한 혁명가인가.

“지금도 마음은 혁명을 하고 있다. 보다 나은 사회를 위한 노력은 계속돼야 하고 한국 사회를 위해 내가 기여할 수 있는 부분은 할 거다. 내년에 안식년을 맞아 서울에 가면 그동안의 시차와 거리감을 따라잡고 싶다. 같은 색깔끼리 모여 뭘 해야 한다는 생각은 안 한다. 경계를 넘어서 자유롭게 발언하고 일하고 싶다.”

―당신의 과거가 현재 개인에게, 한국 사회에 가지는 의미가 무엇이라고 생각하나.

“헨리 롱펠로가 ‘인생찬가’라는 시에서 이렇게 노래했다. ‘미래를 믿지 말라 아무리 즐거울지라도, 과거는 과거로 묻어두라, 행동하라, 살아있는 현실 속에서’.”
 
이진영 기자 ecolee@donga.com
#백태웅#인권#사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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