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경란의 사물 이야기]수첩

  • 동아일보
  • 입력 2016년 8월 17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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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주 동안 ‘굴드의 피아노’라는 책에 빠져 지냈다. 이 책은 피아니스트 글렌 굴드가 사망한 후 캐나다 국립도서관에 그의 유품들이 도착하는 이야기부터 시작한다. 유품 중에는 그 유명한 ‘난쟁이 의자’도 있었다. 1953년에 아버지가 만들어준, 굴드가 ‘평생 애착(愛着)을 지녔던 물건’이며 수십 년 동안 전 세계 어디를 가나 가지고 다녔던 의자다.

애착의 사전적 의미는 ‘사랑하고 아껴서 단념할 수가 없음’이다. 나에게도 그런 사물들이 꽤 있다. 그저 사랑하고 아끼는 것도 있지만 대개는 실용적인 측면에서도 그렇다. 그중에 하나가 수첩이다. 럭셔리한 다이어리 말고, 크기는 손바닥을 넘지 않는 정도에 적당히 얇고 커버가 두껍지 않고 나긋나긋하여 가방이나 주머니 어디에라도 쏙 들어갈 수 있는, 문방구에 가면 쉽게 구할 수 있는 수첩.

나는 기억력이 좋지 않은 데다 그때그때 떠오르는 문장이나 단어들을 적어두지 않으면 불안해져버리는 사람이라 가방마다 제각각 다른 수첩들을 갖고 다니고 침대 옆, 식탁, 책상에 수첩을 올려두고 있다. 재능이 없는데 어떻게 하면 작가가 될 수 있느냐고 물어오는 분들이 종종 있다. 딱 부러지는 대답은 할 수 없지만 이렇게 생각해본다. ‘오래전부터 내가 메모하는 습관을 갖지 않았고 저 쓸모없어 보이는 수첩들을 박스를 채울 정도로 갖고 있지 않았어도 작가로 살아갈 수 있었을까?’ 하고 말이다.

며칠 전에 저녁 모임에 나갔다가 이비인후과 의사와 젊은 목수가 나누는 직업적 이야기들이 재미있어 조용히 수첩을 꺼내 들고 메모를 했다. 옆에 있던 목수가 내 수첩을 보더니 “작은 것을 좋아하시는군요”라고 하기에 그렇다고 했다. 작아 보이지만 그게 언제 어디에 쓰일지 모를 이야기의 씨앗을 품고 있는, 그렇게 적어두는 것만으로 휘발돼 버리지 않는 단편적인 것들로 빼곡한 얇고 큰 것을.

신문에서 이번 양궁 개인전에서 값진 동메달을 딴 기보배 선수의 수첩에 관한 기사를 읽게 되었다. 늘 몸에 지니고 다닌다는 그 선수의 수첩에는 심플하게 활을 쏠 것과 자신의 자세 기술을 믿는다는 것, 그리고 ‘긍정적인 루틴만’이라고 쓰여 있었다. 경기 전 일종의 자기주문 같은 것이겠지. 수첩에 적힌 기보배 선수의 동글동글한 글씨를 보는데 그만 마음이 울컥해져버렸다.

‘문구의 모험’이란 책을 보면 이런 문장이 나온다. ‘생각하기 위해, 창조하기 위해 우리는 뭔가를 적어두어야 하고 생각을 체계화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문구가 필요하다’고. 나는 시장도 가고 백화점도 가고 헌책방도 가지만 도시 어딜 가나 문방구에 들른다. 아끼고 실용적이기까지 해서 단념할 수 없는 사물들로 가득 찬 곳으로. 갖가지 개인적 애착이 그곳에 있다.
 
조경란 소설가
#문구#수첩#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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