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민애의 시가 깃든 삶]선운사에서

  • 동아일보
  • 입력 2016년 7월 8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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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운사에서 ― 최영미(1961∼ )

꽃이
피는 건 힘들어도
지는 건 잠깐이더군
골고루 쳐다볼 틈 없이
님 한 번 생각할 틈 없이
아주 잠깐이더군

그대가 처음
내 속에 피어날 때처럼
잊는 것 또한 그렇게
순간이면 좋겠네

멀리서 웃는 그대여
산 넘어 가는 그대여

꽃이
지는 건 쉬워도
잊는 건 한참이더군
영영 한참이더군


 
장마가 찾아오면 견뎌야 한다. 한참 걸릴 수도 있다. 계속 습한 날씨에 잔뜩 짜증 서린 그대에게, 오늘은 더 긴 괴로움을 소개하고 싶다. 우리가 견뎌내야 할 장마의 ‘한참’은, 이 시의 ‘한참’ 앞에서 참 소소하게 느껴질지 모른다.

지금 이 시인은 한참을 넘어 ‘영영 한참’ 동안 어떤 아픔을 견뎌야 한다. 사실 시인이 작품에 내세운 것은 아픔보다 꽃이다. 그것도 선운사의 꽃, 동백꽃이다. 실제로는 한겨울 말고 4월 초에 핀다지만 이름에 ‘동(冬)’자가 들어가는 이 꽃은 분명 겨울꽃이다. 추위를 조롱하듯 진하게 피어나, 질 때는 목이 베어지듯 미련 없이 지는 탓에 얼마나 많은 예술가들이 이 꽃을 사랑했는지 모른다.

시인은 그냥 ‘꽃’이라고만 했지, 동백꽃이라고 쓰지는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목이 ‘선운사에서’이니까 여기서의 꽃은 자동으로 동백꽃이라고 읽힌다. 그런데 문제는 꽃이 아니라 나를 떠난 ‘그대’에게 있다. 꽃이 지듯 없어졌으면 싶은데, 그 사람을 향한 마음은 도통 지질 않는다. 잘라 버릴 수 없는 마음이 피어나 ‘영영 한참’ 사라지지 않는다니 이 이별의 고통은 속수무책이다. 참 난감한 일이다.

이 난감함 앞에서 장마의 짜증은 사소한 일이 된다. 마음의 동백꽃이 지지를 않는데 장마가 뭐 대수일까. 반대로, 내 님의 동백꽃이 만발한다면 날씨가 뭐 큰일일까.
 
나민애 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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