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짝할 때 한몫을”… 그림 거래상이 작가에게 모작 요구도

  • 동아일보
  • 입력 2016년 7월 4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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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층탐사기획/프리미엄 리포트/위작에 멍드는 미술계]
위작 부추기는 검은 거래 실태

“수년 전 알 만한 기업이 부도가 나서 소장 미술품도 경매에 들어갔거든. 감정하러 회장님 방에 들어갔는데 정면에 딱 걸려 있는 작품이 위작인 거야.”(수도권 미술대 A 교수)

또 위작 논란이다. 동아일보는 이우환 화백의 작품을 둘러싼 논란을 계기로 위작이 근절되지 않는 이유에 대해 미술관, 화랑, 감정, 경매 관계자와 작가, 미술평론가 등을 광범위하게 인터뷰했다. 그중 31명은 설문조사에도 응답했다.

결과는 충격적이었다. 전문 위조단만이 문제가 아니었다. 전문가들은 번듯하게 간판을 걸어놓은 일부 화랑과 개인 딜러가 위법과 합법의 경계를 오가고 있고, 감정은 객관성이 의심되고, 거래는 투기와 탈세 목적으로 이뤄지는 가운데 위작이 생산된다고 지적했다.

○ “드러난 위작은 빙산의 일각”

서울 황학동 풍물시장의 한 상점 진열대. 불상 등 골동품 사이에 이중섭의 ‘흰 소’를 모사한 그림을 얹어놓았다. 한 미술평론가는 
“저작권 보호 기간이 만료된 이중섭의 경우 작가 서명까지 베낀 판화를 인사동 복판에서 판매한다. 오래 된 작품처럼 위조하기 딱 
좋은 재료”라고 말했다. 손택균기자 sohn@donga.com
서울 황학동 풍물시장의 한 상점 진열대. 불상 등 골동품 사이에 이중섭의 ‘흰 소’를 모사한 그림을 얹어놓았다. 한 미술평론가는 “저작권 보호 기간이 만료된 이중섭의 경우 작가 서명까지 베낀 판화를 인사동 복판에서 판매한다. 오래 된 작품처럼 위조하기 딱 좋은 재료”라고 말했다. 손택균기자 sohn@donga.com
현재 미술계 위작 거래는 워낙 은밀하게 진행되기 때문에 그 시장 규모나 인력을 파악하기 어렵다는 게 전문가들의 의견이다.

서울의 한 갤러리 대표는 “미술계 유통 실세들이 범법 행위에 무감각하고 위법과 탈법을 덮는 데 능숙하다”며 “위작임이 드러나도 화랑은 수집가에게 받은 돈만 돌려주고 조용히 무마되는 경우가 많다. 숨은 위작 거래는 드러난 것보다 훨씬 많을 것”이라고 했다. A 교수는 “제자가 스승의 작품을 모작(模作)한 그림이 돌고 돌다 뮤지엄급 전시에 떡 하니 나오기도 한다”고 했다.

설문 응답자 중 10명은 위작이 근절되지 않는 원인으로 ‘미술계 전반의 윤리의식 부재’를 꼽았다. 돈에 눈먼 일부 딜러의 ‘반짝할 때 한몫 잡자’는 행태도 드러났다.

“한국의 한 갤러리가 ‘우리가 조수를 붙여 줄 테니, 그림을 더 많이 그려줄 수 없느냐’고 물어왔다는 거예요.” 미술관 관계자 B 씨는 설문에 답하지 않는 대신 중국의 한 톱클래스 화가의 작품을 다루는 중국 화랑 관계자를 만났던 경험을 털어놓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해당 작가는 중요 현장에서 직접 그림을 그리기로 유명한 화가였다. “그 화가가 ‘나는 그런 작가가 아니다’라고 했다고 웃으면서 전하는데, 저 빼고는 외국인들만 있었거든요. 민망했죠.”

또 다른 미술관 관계자는 일부 화상(畵商)이 작가 본인에게 ‘팔리는’ 그림과 유사한 작품을 요구하기도 한다고 증언했다. 물론 갤러리가 피해를 보는 일도 있다. 서울 강남구의 한 갤러리는 최근 ‘뜨고 있는’ 동남아 작가의 작품을 현지 갤러리로부터 보증서를 받고 공수해 고객에게 팔았다가 위작으로 드러나 돈을 물어줘야 했다.

○ 신뢰 잃은 감정

작품당 적어도 수천만 원을 호가하는 ‘A급 위작’뿐 아니라 키치와 사실상 구별이 어려운 ‘B급’ 위조 시장도 만성화돼 있었다.

“정체불명의 작품을 보따리에 꽁꽁 싸매 들고 와 ‘이중섭의 귀한 판화를 하나 얻었는데 여기서 살펴보고 전시한 뒤 돌려 달라’고 하는 사람이 꽤 있다. 모두 모조품 가게에서 만든 것을 오래 묵은 작품처럼 2차 가공한 위조품이다. 거절하고 감정 전문기관 연락처를 알려준다.”(한 사설 미술관 대표)

현장 취재 결과 한국 근대미술을 대표하는 작가 이중섭의 경우 대놓고 ‘미술품 복원 전문가’라 광고하며 모조품 판화를 대량 생산하는 가게가 서울 인사동길 복판에서 발견됐다. 저작권 보호 기간이 끝났기 때문. 지난달 말 케이블TV 홈쇼핑 채널은 이런 상품을 ‘이중섭 판화’라며 판매하기도 했다.

문제는 위작을 걸러내야 할 감정단체들마저 신뢰성을 의심받고 있다는 것이다. 윤범모 미술평론가는 “화상들이 감정단체를 주도하고 있어 신뢰의 문제가 있다”고 말했다. 한 감정 전문가는 “지인이 한 감정단체가 진품 감정서를 발급한 작품을 살 뻔했는데 위작이었다”고 했다.

작가에게 진위 판정을 맡길 수 없다는 의견도 적지 않았다. 한 미술관 관계자는 “다작(多作)하는 작가라면 작품을 일일이 기억하기 힘들다”고 말했고, 정준모 미술평론가는 “외국은 생존 작가가 자신의 작품의 진위에 대해 의사 표시를 하지 않는 것이 일반적”이라고 했다.

○ 시장 성장 가로막는 위작

컬렉터들이 미술품을 은밀히 소장하는 풍토도 위작이 발붙일 여지를 준다는 지적이 나온다. 윤범모 미술평론가는 “일부에서 미술품을 투기 수단이나 탈세에 악용하고 있다”며 “익명으로 소장하는 문화가 타개되지 않는 한 논란은 반복될 것”이라고 했다.

서울 인사동길에서 갤러리를 운영하는 C 씨는 “미술품 구매자 중에 도둑놈들이 있다”며 목소리를 높였다. 그는 “중견 기업 임원이라며 ‘2억, 3억 원짜리 작품을 찾는데, 영수증은 10억 원으로 끊어 달라. 세금은 우리가 낸다’고 해 쫓아낸 일이 있다”고 털어놓았다. 또 다른 갤러리 대표는 “그런 거래가 이뤄진다 해도 비자금 조성이 목적이라는 것을 아는데 화상이 제대로 된 물건을 넘겨주겠느냐”고 말했다. 한 감정가는 콕 집어 “위조범들의 다음 타깃은 최근 경매 기록을 세운 김환기 작가일 것”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정부는 최근 미술품 유통업 인허가제, 거래이력 신고제, 공인감정제 등을 골자로 한 ‘미술품 유통 투명화 정책’을 내놓았다. 설문 응답자들 중에는 정부 대책에 ‘매우 큰 효과’(2명)나 ‘약간의 개선을 기대한다’(15명)는 긍정적 의견이 ‘별다른 변화가 없을 것’(11명)이라거나 ‘상황이 악화될 것’(3명)이라는 의견보다 많았다.

최은주 경기도미술관장은 “유럽 선진국 미술관의 도록을 보면 작품 소장 이력을 수백 년 전 소장자부터 하나하나 밝혀 놨다”며 “이처럼 거래 이력이 투명해지면 위작 시비는 대폭 줄어들 것”이라고 말했다. 반면 “신고제는 시장을 위축시킬 것”이라는 의견도 일부 있었다.

전문가들은 위작 논란이 빈발하는 한 한국의 미술시장은 영원히 ‘B급’을 벗어나지 못할 것이라고 지적했다. 최 관장은 “위작 논란을 일찌감치 잠재웠다면 한국의 미술시장은 홍콩처럼 성장할 수 있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 전문가 설문 응답자 명단
(31명·가나다순) ::

강승완
국립현대미술관 학예연구1실장, 기혜경 북서울미술관 운영부장, 김기라 작가, 김영석 한국미술시가감정협회 이사장, 김주삼 아트C&R 미술품보존복원연구소장, 류병학 독립큐레이터, 문경원 작가, 박경미 PKM갤러리 대표, 박여숙 박여숙화랑 대표, 박우홍 한국화랑협회장, 서성록 한국미술품감정협회장, 서용선 작가, 서진석 백남준아트센터 관장, 서진수 강남대 경제학과 교수(미술시장연구자), 안규철 한국예술종합학교 미술원 교수, 안병광 서울미술관 회장, 안소현 독립큐레이터, 양정무 한국예술종합학교 미술원 교수, 우정아 포스텍 인문사회학부 교수, 우찬규 학고재 회장, 윤범모 미술평론가, 이동기 작가, 이수균 성곡미술관 학예실장, 전준호 작가, 정준모 미술평론가, 조덕현 이화여대 조형예술대 교수, 최명윤 국제미술과학연구소장, 최병식 경희대 미대 교수, 최윤석 서울옥션 상무, 최은주 경기도미술관장, 하종현 작가(전 서울시립미술관장)
 
조종엽 기자 jjj@donga.com·김배중 기자
 
#위작#미술#모작#화랑#미술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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