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크 진단]왜 사람들은 ‘순백의 만찬’에 모였을까

  • 동아일보
  • 입력 2016년 6월 13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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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일 서울 반포한강공원에서 열린 ‘디네앙블랑 서울’ 행사에서 흰색 옷을 입은 1200여 명의 참석자가 만찬을 즐기고 있다. 디네앙블랑 서울 제공
11일 서울 반포한강공원에서 열린 ‘디네앙블랑 서울’ 행사에서 흰색 옷을 입은 1200여 명의 참석자가 만찬을 즐기고 있다. 디네앙블랑 서울 제공
김선미 소비자경제부 차장
김선미 소비자경제부 차장
11일 저녁 수십 명의 남녀가 머리부터 발끝까지 흰옷으로 차려입고 내 앞을 걸어가고 있었다. 서울 지하철 고속터미널역에서 나와 잠수교로 향하는 행렬이었다. 드레스를 입은 여자, 한복을 입고 레이스 양산을 쓴 여자, 중절모를 쓰고 트렁크를 끄는 남자…. 의상과 소품까지 온통 흰색이었다.

역시 흰 드레스를 입고 머리엔 커다란 흰 꽃 장식을 한 나를 보고 지나가던 아저씨가 물었다. 궁금해 못 견디겠다는 표정이었다.

“오늘 무슨 일 있나요?”

“네, 오늘 세빛둥둥섬 앞에 사람들이 흰색 옷 입고 모여 저녁 먹어요.”

이날 열린 행사는 제1회 ‘디네앙블랑 서울’이다. 1988년 프랑스인 프랑수아 파스키에 씨가 친구들과 연 디너파티 ‘디네앙블랑(Le D^iner en Blanc·흰색 차림으로 저녁 먹기)’에서 비롯됐다. 파스키에 씨는 많은 친구들을 초대해 드넓은 불로뉴 숲에서 파티를 열면서 서로 쉽게 알아볼 수 있도록 흰색 옷을 입도록 했다. 손님들은 이 색다른 경험에 흡족해했고, 이후에도 이런 파티가 열리기를 원했다.

여기에서 콘셉트가 탄생한 디네앙블랑은 프랑스 궁정문화를 재현한다는 취지로 음식, 패션, 공연을 즐기는 야외 복합문화 행사로 발전했다. 그동안 에펠탑, 루브르박물관 앞 등 파리 주요 명소 주변에서 열려 왔다. 매번 1만 명이 넘는 사람들이 모여 장관을 이뤘다. 8일(현지 시간)엔 올해로 28주년을 맞은 이 행사가 파리 방돔 광장에서 열렸다.

또 세계적으로 상표등록을 한 ‘디네앙블랑’은 미국 뉴욕, 호주 시드니 등 25개국 60여 개 도시에서도 열리는 국제적 행사가 됐다. 그제 한-프랑스 수교 130주년을 맞아 열린 첫 서울 행사에는 1200여 명이 모였다. 이날 흰색 셔츠와 바지를 입고 참석한 파비앵 페논 주한 프랑스 대사는 “디네앙블랑이 한국적으로 재해석된 모습이 흥미롭다”고 말했다.

왜 사람들은 ‘순백의 만찬’에 모였을까. 세 가지로 이유를 정리해 봤다.

① 자발적 참여의 즐거움


이 행사는 인터넷으로 신청하고 참가비(두 명에 90달러)를 내면 누구나 참여할 수 있다. 모든 참가자는 ‘우아한 흰색 옷차림’을 하고 테이블과 그릇, 음식을 직접 준비한다. 서울시내 네 군데 집결지를 미리 공지하고 만찬 장소는 행사 시작 2시간 전에 집결지에서 알려줬다. 고속터미널역은 그 집결지 중 하나였다.

간호사라는 한 30대 여성은 친구들과 순백의 테이블을 꾸몄다. 화이트와인과 테이블 꽃 장식도 트렁크에 챙겨 왔다. 왜 여기에 왔느냐고 묻자 “내 인생에 이런 드라마틱한 경험을 언제 또 해 보겠느냐”고 말했다. 스스로 모인 사람들은 각자 준비해 온 음식을 옆 테이블의 모르는 사람들과 나눠 먹기도 했다.

② 판타지를 충족시키는 축제


야외 행사장에 어둠이 내려앉자 재즈 공연 등이 오후 11시까지 이어졌다. 사회자도, 진행자도 없지만 다들 무대 앞에 나가 음악과 춤을 즐겼다. 행사에서 만난 한 패션업계 관계자는 “요즘 젊은 세대는 삶을 즐길 줄 안다. 판을 벌여주면 언제든 놀 준비가 돼 있다. 기성세대처럼 쭈뼛거리지 않는다. 갑갑한 미래를 괴로워하는 대신 이렇게 욕구를 분출하는 것 같다”고 말했다. 함께 간 지인은 호모 페스티부스(Homo Festivus), 즉 ‘축제하는 인간’의 시대를 절감한다고 말했다.

③ 나만의 SNS 콘텐츠를 찾아서

이날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에는 ‘디네앙블랑 서울’이라는 해시태그(#)가 달린 사진 게시물이 주렁주렁 올라왔다. 해시태그는 SNS에서 검색이 편리하도록 만든 일종의 메타데이터로, 누구나 SNS에서 ‘#’ 뒤에 단어를 넣으면 원하는 정보를 모아 볼 수 있다.

1200명이 흰색 옷을 입고 만찬을 즐기는 모습은 반포 한강공원을 지나는 시민들에게도 흥밋거리였다. 흰 백합과 화이트와인, 흰 풍선과 화사한 미소들…. 레이스 드레스를 입은 한 참가자는 “오래 추억에 남을 사진을 인스타그램에 많이 올리게 돼 기쁘다”고 했다.

한국은행은 전날인 10일 기준금리를 연 1.50%에서 연 1.25%로 낮추면서 사상 최저 금리의 역사를 새로 썼다. 온 나라가 가계 소비를 끌어올리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다. 그런데 소비는 합리적 계산 말고도 감성적 요인의 영향을 꽤 받는다. 요즘 소비자는 무엇을 원하는가. 소비하고 싶은 인간에게 어떻게 즐거운 소비의 장(場)을 펼칠 것인가. 소비자의 감성 취향을 저격할 ‘무기’가 있는가. ‘순백의 만찬’에 모인 인파를 보면서 정부와 기업들이 작은 실마리라도 얻었으면 한다.

김선미 소비자경제부 차장 kimsunmi@donga.com
#김선미#데스크진단#축제#디네앙블랑 서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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