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영광의 시의 눈]살아남은 자의 슬픔

  • 동아일보
  • 입력 2015년 8월 31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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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남은 자의 슬픔 ―베르톨트 브레히트(1898∼1956)

물론 나는 알고 있다. 오직 운이 좋았던 덕택에
나는 그 많은 친구들보다 오래 살아남았다. 그러나 지난 밤 꿈속에서
이 친구들이 나에 대하여 이야기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강한 자는 살아남는다.”
그러자 나는 자신이 미워졌다.


정성과 노력에 따르는 것이라면 ‘운’은 거리낄 게 아닐 듯하다. 하지만 나의 행운이 남의 불운이 되는 경우가 없지 않고 그러한 경우를 우리가 기대하며 살기도 한다는 걸 떠올리면, 운을 그저 반기기도 어렵다. 시인이, 제가 운 좋게 살아남았으니 괜찮다고 말은 하면서도, 속으로는 운에도 무슨 잘못이 있지 않았을까 두려워하는 것도 이런 생각과 닿아 있을 것이다. 죄의식 또는 무의식의 목소리가 죽은 친구들의 입을 빌려 꿈에 나타난 걸 보면.

시인은 제 마음을 몰아붙여 몹시 괴로운 상태에, 우리가 양심이라 부르는 것에 붙잡아 매려 한다. 어느 때나 양심은 떵떵거리기 어려운 마음이다. 그것은 이성적 논변을 넘어서는 곳에 살고 있고, 그 가책이란 온갖 변호의 논리로도 막아낼 수 없는 심장 출혈이기 때문이다. 그의 ‘꿈속’은 그의 진짜 ‘현실’이다.

악한 권력과 싸우다 바로 그 권력을 닮아가는 것은 늘 경계해야 할 일인데, 반생을 파시즘 체제에 저항했던 시인에게 ‘강한 자는 살아남는다’는 내면의 목소리는 충격이었을 것이다. 그에게 ‘강한 자’는 더이상 양심의 편에 설 수 없는 사람을 뜻할 터이기 때문이다. 그런 자신을 미워해야 하는 사태가 곧 살아남은 이의 부끄러움이 되고 슬픔이 된다.

침침한 불빛 아래서 나는 생각한다. 운은 괴롭기만 한 것인가? 강한 것은 나쁘기만 한 것일까? 그렇지 않을 것이다. 살아남은 우리 모두는 운이 좋았을 뿐 아니라 강하기도 한 사람들이다. 그리고 강한 자는, 강하기에 무언가를 해야 하는 사람이다. 처지와 생각은 다 다르겠지만, 그것은 결국 생존을 그저 요행에 맡겨야 하는 불구의 사회를 어떻게든 치료해 보자는 방향으로 모일 것이다. 지난 주말, 단원고등학교의 옛 2학년 교실에서, 나는 저 망명시인이 꿈에 들었던 말과 같은 말을 얼핏 들었던 것만 같다.

이영광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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