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호택 칼럼]‘평양의 영어선생님’과 문재인의 ‘국제시장’

  • 동아일보
  • 입력 2014년 12월 31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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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넷 단절되고 빛, 영양, 열없는 갈라파고스에서 공부하는 평양 대학생들
‘국제시장’은 경제적 풍요 누린 젊은 세대가 부모에게 바친 헌사
통진당 사람들, 황선, 신은미… 균형 잡힌 눈으로 북을 보라

황호택 논설주간 채널A 시사프로 ‘논설주간의 세상보기’ 진행
황호택 논설주간 채널A 시사프로 ‘논설주간의 세상보기’ 진행
북한의 대학생들은 에세이를 쓸 줄 몰랐다. 그들이 써본 글이라곤 위대한 지도자 동지의 업적을 한없이 찬양하는 것이었다. 북한 대학생들은 어떤 주장을 논증(論證)하는 글쓰기 훈련이 안 돼 있었다. 서론 본론 결론으로 구성된 3∼5문단짜리 에세이는 그들에게 너무 생소했다. 수키 김은 서론이란 독자를 끌어들이는 인사말 같은 것이라고 설명했지만 평양의 대학생들은 서론의 의미를 이해하는 데 어려움을 토로했다.

평양과학기술대학은 수시로 정전이 됐고 겨울철엔 난방이 제대로 안 돼 혹독하게 추웠다. 평양의 대학생들에겐 자유만큼이나 빛과 열과 영양이 부족했다. 과학기술이 전공인 학부생들이 쓰는 컴퓨터도 인터넷과 단절된 갈라파고스였다. 스티브 잡스의 오비추어리(부음 기사)를 가르치기 위해서도 대학에 나와 있는 감독관의 허가를 받아야 했다.

수키 김이 평양과기대에 근무한 지 2주 만에 김정일이 방문한 적 있는 사과 과수원에 갔다. 그가 탄 버스가 건설현장을 지날 때 눈이 퀭하고, 볼이 움푹 들어가고, 누더기 옷을 입은 노동자들을 목도했다. 머리를 박박 깎아서 나치 수용소의 재소자들처럼 보였다. 그 풍경이 너무 끔찍해 동료와 “노예”라는 말을 속닥거렸다.

요즘 북한 찬양 토크 콘서트로 논란을 빚는 신은미가 쓴 책 ‘재미동포 아줌마 평양에 가다’에서 북한은 주민이 좋은 옷을 차려입고 유원지에 나와 맛있는 음식을 먹는, 살 만한 나라다. 수키 김이나 신은미나 어차피 북한에 가면 보여주는 곳만 볼 수 있다. 그러나 신은미에게는 보여주는 것을 넘어 그 이면을 보는 관찰력이 부족했다.

신은미는 책에서 “한국 텔레비전에 나온 일본인 북한 전문가가 ‘대부분의 북한 사람들은 스키가 무슨 말인지조차 모른다’고 험담을 했는데 돌팔이 전문가”라고 비판한다. 신은미는 그 근거로 북한에서 전국적으로 ‘마식령 속도’라는 구호가 나부끼는 것을 들었다. 마식령 속도는 ‘마식령 스키장을 건설하는 그 속도로 모두 일떠나서자’라는 의미다. 북한 사람들이 스키가 뭔지 모르면 그런 구호가 나오겠느냐고 반문한다.

그러나 특권층 자제들이 다니는 평양과기대에서 조차 수키 김이 칠판에 ‘나는 뉴욕에 있는 산에서 스키 타는 것을 좋아한다’고 영어로 쓰자 학생들끼리 “스키가 뭐야”라고 수군거렸다. ‘학급 서기’ 학생이 손을 들고 “스키를 타봤다”고 말했지만 “어디서 탔느냐”고 묻자 침묵했다. 그들은 인공 눈이나 스키에 대해 알지 못했다.

수키 김 책의 원제는 ‘당신(김정일)이 없으면 우리도 없다’지만 한국에서는 신년에 ‘평양의 영어선생님’(번역 홍권희)이라는 제목으로 출판된다. 문화체육관광부의 우수문학도서로 선정받아야 할 책은 ‘재미동포 아줌마…’가 아니라 ‘평양의 영어선생님’ 같은 책이다.

신은미는 가요 ‘굳세어라 금순아’의 무대인 흥남부두에서 찍은 사진 5장을 인터넷 연재 글에 붙여 놓았다. 당시 부산 인구가 50만 명이었으니 흥남 철수 피란민 10만 명은 엄청난 숫자다. 신은미의 책에는 왜 이 많은 사람이 김일성 치하의 북한을 탈출해 자유민주주의 체제를 선택했는지에 대한 공부가 부족하다. 보나 마나 흥남 철수는 북한에서 철저하게 지워버린 역사일 것이다.

지난주에는 윤제균 감독의 영화 ‘국제시장’을 봤다. 흥남에서 미군 상선에 실려 거제도에 도착한 피란민들은 가구당 모포 한 장과 토굴 같은 움막을 배급받았다. 그러나 억척같은 생활력으로 부산에서, 서울에서 뿌리를 내렸다. 전쟁과 서독 광부 파견, 월남전 등 격동의 현대사를 살며 오늘의 한국을 일군 세대들의 이야기에 눈시울을 적셨다는 사람이 많다.

문재인 의원은 부산에 정착한 흥남 철수 피란민의 후손이다. 문 의원은 성탄절 전날인 24일 ‘님아, 그 강을 건너지 마오’와 ‘국제시장’을 놓고 고민하다 ‘님아…’를 관람했다고 한다. 그러다 오늘 ‘국제시장’을 관람하는 모양이다. 영화도 편 갈라서 볼일이 아니다. 이 영화를 억지로 이념적으로 재단하기보다는 윤 감독처럼 경제적 풍요의 과실을 따먹은 세대가 가난과 전쟁 속에서도 자식을 열심히 키우고 가르친 부모에게 바친 헌사(獻辭)라고 보면 좋을 것이다.

통진당 사람들이나 황선 신은미는 북한을 똑바로 봐야 한다. 그곳은 소수의 특권층이 주민을 노예처럼 부리는 나라다. 김정은 3대 세습정권을 지지하고 북한의 인권 유린에 눈감으면서 한국이 이룬 기적과 성취를 폄하하는 것은 역사와 현실을 보는 균형 잡힌 눈이 아니다.

황호택 논설주간 채널A 시사프로 ‘논설주간의 세상보기’ 진행 hthwang@donga.com
#국제시장#통진당#신은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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