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인숙의 행복한 시 읽기]<349> 아직

  • 동아일보
  • 입력 2014년 12월 17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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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
―유자효(1947∼)

너에게 내 사랑을 함빡 주지 못했으니
너는 아직 내 곁을 떠나서는 안 된다
세상에서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은
내 사랑을 너에게 함빡 주는 것이다
보라
새 한 마리, 꽃 한 송이도
그들의 사랑을 함빡 주고 가지 않느냐
이 세상의 모든 생명은
그들의 사랑이 소진됐을 때
재처럼 사그라져 사라지는 것이다
아직은 아니다
너는 내 사랑을 함빡 받지 못했으니

마치 철칙인 듯 선물은 번듯한 것으로, 무엇을 베풀 때는 풍성하게 하는 친구가 있다. 받는 사람의 기분을 깊이 헤아리는 그 마음은 아름답지만, 곤궁하다 할 수 있는 그의 형편을 아는지라 옆에서 볼 때마다 안타깝다. “이것저것 섞어서 이천 원어치만 주세요.” 인색함이나 근천스러움에 대해 떠올릴 상황이 됐을 때 그와 주고받는 오래된 농담인데, 누군가의 집을 방문하는 길에 한 일행이 이리 주문했단다. 그의 기질에 얼마나 경악했을까. 하지만 예의 그 사람은 제 말이 우리의 신랄한 농담거리가 된 줄 짐작도 못하리라. 마음이든 물질이든 우리는 저마다의 경제관념을 갖고 있다. 사랑의 총량도 저마다 다르리라. 그리고 대개 우리는 그 총량을 다 쓰지 못하고 가리라. 그래야 하리라. 사랑이 바닥난 채로 남은 삶이라니 생각만 해도 스산하다. 가장 이상적인 것은 ‘그들의 사랑이 소진됐을 때/재처럼 사그라져 사라지는 것’일 테다.

‘너에게 내 사랑을 함빡 주지 못했으니/너는 아직 내 곁을 떠나서는 안 된’단다. ‘아직’이란 말에 밴 안타까움이 어떤 절박한 상황을 떠오르게 한다. 하지만 사랑이 깊으면 그 대상에 대해 항상 이리 절박한 느낌을 가지리라. 시에 ‘함빡’이란 말이 거듭 나온다. 화자가 가진 사랑의 빛깔은 알 수 없지만, 그 양은 아무리 퍼내도 마르지 않는 샘처럼 무한정이리라. 그러니 언제까지라도 ‘아직’일 테다. 언제까지라도 못다 한 사랑이 너무 많을 테다. 이 사랑의 부자는 항상 제 사랑이 ‘아직’이라고 안달하는 사랑의 거지이기도 하다.

황인숙 시인
#아직#유자효#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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