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달에 만나는 詩]운명과 싸우는 애처로운 몸부림… 가벼운 시어로 완성된 무거운 시

  • 동아일보
  • 입력 2014년 10월 8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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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동혁 시인
성동혁 시인
유리창에 성에가 낀 고요한 겨울밤, 눈을 기다리는 ‘나’는 잠들지 못하고 있다. 그는 서랍 속 여름옷을 꺼내 펴보거나 부엌 싱크대 물을 틀며 서성이고 있다. 밤이 깊어질수록 그는 희박해지고, 희미해진다. 그는 마지막 애인에게 미안한 일이 많았다며 꽃을 선물하고 싶어 한다. 결혼식 부케용으로 인기인 리시안셔스의 꽃말은 변치 않는 사랑이다.

‘이달에 만나는 시’ 10월 추천작은 성동혁 시인(29)의 ‘리시안셔스’다. 2011년 ‘세계의 문학’을 통해 등단한 시인의 첫 시집 ‘6’(민음사)에 실렸다. 추천에는 김요일 신용목 이건청 이원 장석주 시인이 참여했다.

성 시인은 시집의 ‘시인의 말’에 딱 한 줄 ‘이곳이 나의 예배당입니다’라고만 썼다. 그는 본보와의 인터뷰에서 “다섯 번의 수술을 거치며 신에 대한 믿음과 사람들에 대한 감사함이 커졌다. 시집을 엮으며 이 시집이 하나의 아름다운 기도문이 되길, 하나의 아름다운 편지가 되길 바랐다”고 했다.

“맥박이 희미해질 때가 있었어요. 저를 살리려고 여러 사람들이 헌혈을 하고 기도를 했어요. 수술실 안에서 열아홉 시간을 보냈어요. 깨어 보니 중환자실이었어요. 인공심폐기를 끼고 움직일 수도 없는 순간이었지만 전 다짐했어요. 이곳을 나가면 수술실 밖에서 기다리던 사람들에게 꼭 사랑한다고 말해야지. 이 시는 제가 희박해지고 희미해진 순간, 저를 붙들고 있던 사람에게 건네는 꽃다발 같은 거예요. 제가 잠든 후에야 잠들던 사람에게 쓴 편지 같은 거예요.”

장석주 시인은 “성동혁 시를 읽는 일은 불편하다. 그의 몽환적 화법이 낯설기도 하거니와 어린아이의 연약함을 유지한 채 괴물 같은 자기 운명과 싸우는 모습이 애처롭기 때문이다. 하지만 놀라운 직관으로 생의 본질들을 꿰어내는 흔치 않은 시적 재능이 번뜩인다”고 했다.

이원 시인은 “성동혁의 첫 시집으로 한국시의 청교도 계보는 더 깊은 방향으로 써지게 됐다. 성동혁은 세상 너머까지 다다르는 희박한 언어를 만들어낸다”고 평했다.

신용목 시인은 손택수 시집 ‘떠도는 먼지들이 빛난다’(창비)를 추천하면서 “시어는 무거워지고 시는 가벼워지는 시대에 가벼운 시어로 무거운 시를 완성할 줄 아는, ‘삶의 장인’”이라고 했다. 김요일 시인은 안성덕 시인의 첫 시집 ‘몸붓’(문학의전당)을 꼽았다. “오일장에서 불콰하게 한잔 걸치고 구성진 노래 부르며 멀어지는 사내의 뒷그림자를 닮았다. 능청스레 풀어놓은 그의 시편들은, 맛있는 비빔밥처럼 풍자와 은유가 제대로 버무려져 읽는 내내 ‘얼쑤’ 하며 맞장구치게 한다.”

이건청 시인은 김영석 시집 ‘고양이가 다 보고 있다’(천년의시작)를 골랐다. 그는 “공고하면서도 단아한 서정시의 광채를 본다. 등단 45년 만에 다섯 번째 시집을 펴낸 노시인의 정련된 서정이, 파격과 일탈과 무잡스러움이 판치는 요즘 한국시 속에서 귀한 개성으로 읽힌다”고 했다.

박훈상 기자 tigermask@donga.com
#리시안셔스#성동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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