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인숙의 행복한 시 읽기]<293>줄넘기 8

  • 동아일보
  • 입력 2014년 8월 6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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줄넘기 8
―정진명(1960∼ )

아내가 줄넘기를 한다.
스치는 발바닥으로 줄을 넘기며
사라진 줄이 만드는 둥근 공간 속에서 활짝 웃는다.

하나, 두울, 세엣, 네엣 박자를 겨누다가
잠시 열린 줄의 틈으로
딸아이가 뛰어든다.
엄마의 방 속에서 엄마와 함께 뛰는
딸아이의 머리채가 구름 높이 출렁인다.
환한 하늘이 이마로 내려온다.
엄마와 마주했다, 뒤로 돌아섰다,
방향을 바꾸며 솟을 때마다
줄 안의 공간도 덩달아 환해진다.
아내와 딸이 하는 한 박자 줄넘기.

박자가 드러낸 줄 틈으로
아이가 재빨리 뛰쳐나오고
통통 튀는 방 속에 아내 혼자 남아있다.
아들아이도 박자로 줄의 틈을 열고 들어간다.
등이 굽은 할머니도 들어갔다 나온다.
줄과 줄 사이의 엇박자가
온 가족을 토하고 뱉는 줄넘기.

나도 그 줄 속으로 들어가 본다.
아내의 숨결이 얼굴에 닿는다.
오랜만에 맞춰보는 경쾌한 박자에
몸속 깊이 잠든 율동이 파도처럼 인다.
아내의 줄이 만든 작은 방 속에서
온 세상이 함께 뛴다.

아내의 방에서 빠져나간 아이들이
아내한테 배운 박자로 저만의 줄넘기를 한다.
하하호호 웃으며 작은 방의 빛 송이를 끌고
제 갈 길로 멀어져간다.


이 시를 읽으니 골목이 떠나가라 목청 높이고 뛰놀던 어린 시절이 떠오른다. ‘꼬마야, 꼬마야, 줄을 넘어라!/꼬마야, 꼬마야, 뒤를 돌아라!/꼬마야, 꼬마야, 땅을 짚어라!/꼬마야, 꼬마야, 만세를 불러라!/꼬마야, 꼬마야, 잘∼ 가거라!’ ‘꼬마야 꼬마야’는 술래 두 사람이 양끝을 잡고 돌리는 줄을 넘는 놀이다. 줄넘기 줄은 기특하다. 아니, 인간은 기특하다. 돌돌 말면 한 줌밖에 안 되는 줄 하나로 얼마나 많은 놀이와 운동을 할 줄 아는지!

정진명 시집 ‘줄넘기와 비행접시’에는 줄넘기에 삶의 여러 양태와 속성을 겹쳐 보는 줄넘기 시 스물일곱 수가 실려 있다. ‘줄넘기 8’의 줄넘기는 단둘이 하는 줄넘기다. 한 사람이 돌리는 줄이 만드는 공간에는 아주 친한 사람만 함께 할 수 있다. ‘아내가 줄넘기를 한다.’ 기실 가정이란 저절로 화목하고 견고한 게 아니다. 줄을 밟으면 죽는 줄넘기 놀이처럼 한순간에 허물어질 수 있는 것이다. 화자의 아내는 건강하고 밝은 성품에 센스 있는 여인이다. 이런 이가 가정의 중심이니 얼마나 든든하고 고마운가. 아내가 팔뚝 힘 다해 부지런히 줄을 돌리고 힘차게 뛰며 줄넘기를 한다. 그 줄넘기의 ‘둥근 공간’에 가족들이 하나하나 깃들인다. 넷째 연의 부부 줄넘기가 경쾌하게 에로틱하다.

황인숙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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