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인숙의 행복한 시 읽기]<292>흑산도 서브마린

  • 동아일보
  • 입력 2014년 8월 4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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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산도 서브마린
―이용한(1968∼ )

흑산도에 밤이 오면
남도여관 뒷골목에 노란 서브마린 불빛이 켜진다
시멘트 벽돌의 몰골을 그대로 다 드러낸,
겨우 창문을 통해 숨을 쉬는지는 알 바 없는
서브마린에 불이 켜지면
벌어진 아가미 틈새로 하얗고 비린 담배 연기가 흘러나온다
세상의 험한 욕이란 욕도 거기서 다 흘러나온다
갈 데까지 간 여자와 올 데까지 온 남자가
곧 죽을 것처럼 한데 뒤엉킨
서브마린에서는 때때로 항구의 악몽과 통곡이
외상으로 거래되고
바다의 물거품과 한숨이 아침까지 정박한다
지붕위에선 밤새 풍랑이 일고
지붕 아래선 끈적한 울음 같은 것들이 기어간 흔적이
수심에 잠긴 뻘밭 같기만 한데,
밤 깊은 서브마린에서는 사는 게 사는 게 아니고
세상은 다 끝난 것만 같은데,
아침이면 다들 멀쩡하게 바다로 출근하는 것이다
죽을 것처럼 살아서 거짓말처럼 철썩거리는 것이다
그렇게 또 하루가 저물고 나면
어김없이 서브마린에 노란 불빛이 켜지고
항구의 낡은 사내란 사내 거기서 다 술 마신다
저렇게 버려진 잠수함으로는 아무 데도 갈 수 없지만,
한 번 시동 걸린 사내들은 어디든 간다
목포의 눈물에서 흑산도 아가씨까지
거기서 술을 팔든 몸을 팔든 내 알 바 없지만,
남도여관 창문을 반쯤 열어놓고 나는
바닥의 절박한 생을 끌고 가는 한 척의 슬픈 잠수함을 본다.


이 시가 실린 이용한 시집 ‘안녕 후드득 씨’는 눅눅한 정조로 마음의 갈피가 달라붙은 듯한 화자의 결코 낭만적이랄 수 없는 방황과 방랑의 기록이다. 그러나 화자는 제 자신이나 만사를 관조하고 드물지 않게 유머를 구가해 독자 마음에 바람을 쐬어준다. 그래도 쓸쓸함과 황폐함, 그리고 막막한 비관주의가 내내 떠돈다. 길고양이들의 행복한 순간들을 사진과 에세이로 담은 ‘안녕 고양이는 고마웠어요’로 이용한을 기억하는 독자에게는 뜻밖인 어두운 정서다.

‘서브마린’은 선창가 뒷골목의 무척 허름한 술집, 노란 불빛으로 그 창이 밝혀지면 ‘갈 데까지 간 여자와 올 데까지 온 남자’들이 밤새도록 고성방가와 악다구니와 욕설을 쏟아낸다. ‘겨우 창문을 통해 숨을 쉬는지는 알 수 없지만’, ‘거기서 술을 팔든 몸을 팔든 내 알 바 없지만’은 언뜻 말도 참 이상하게 한다 싶지만, 냉담해서나 무시해서가 아니라 과객의 예의로 그 서글픈 정황을 짐짓 ‘알 바 없다’는 것이다. 취흥에 도도해지는 게 아니라 ‘수심에 잠긴 뻘밭’으로 가라앉으며 ‘세상 다 끝난 것만 같은’ 분위기를 연출하는 술집 ‘서브마린’. 흑산도 뒷골목의 비릿한 삶이 다 여기 고이네.

황인숙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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