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인숙의 행복한 시 읽기]<270>첫과 끝

  • 동아일보
  • 입력 2014년 6월 13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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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과 끝
―김왕노 (1957∼ )

나에게도 내 몸의 첫인 손가락과 끝인 발가락이 있다.

나는 그러니 첫과 끝의 합작품이다.

나의 첫인 손을 내밀었다가 그 끝인 발로 이별하기도 했다.
이 수족으로 나는 한 여자에게 첫 남자와 끝 남자이기를 꿈꿨다.
나의 첫과 끝으로 사랑을 찾아가 내 사랑의 첫과 끝을 어루만졌다.

너도 너의 첫과 끝으로 나의 첫과 끝이 되곤 했다.

그첫과끝이있기에우리는부둥켜안고전율하고눈물이났다.

너는 너의 첫을 내게 주므로 나의 끝이기를 바랐다.

너의 첫 키스, 첫날밤, 첫 요리, 첫 꽃을 주어 나의 끝이기를 바랐다.

다가갈수록 자초지종인 듯 내게 주는 너의 첫
그 첫이 너의 끝으로 나의 첫으로 이어가는 징검다리인줄 안다.

이 시를 읽으면서 뜬금없이 고등학교에서 국어를 가르치는 후배한테 들은 논술시험 채점 항목이 생각났다. 이해력, 분석력, 논리력, 창의력, 표현력. ‘나에게도 내 몸의 첫인 손가락과 끝인 발가락이 있다’라, 몸의 첫이 발가락이고 끝이 손가락일 수도 있지 않나? 첫 행에서 논리적 결함을 발견한 듯 갸웃거려지던 고개가 ‘나의 첫인 손을 내밀었다가 그 끝인 발로 이별하기도 했다’에서 이내 끄덕여진 때문인지 모른다. 시를 이런 식으로 분석해서 읽으면 안 되는데, 나쁜 버릇이다. 핑계를 대자면, 감정이입은커녕 독해가 안 되는 뉴에이지 시집이 드물지 않아 생긴 버릇이다. 시를 이해하는 코드가 내게 없는 게 아닌가, 겸허하게 한 수 배워보려고 시집 해설을 읽다가 ‘시도 이상한데 해설은 더 이상하네!’ 삐친 적도 여러 차례다. 그러다 보니 시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아듣게만 쓰여도 반가울 지경이다. 표현이 혼돈이든 수렁이든 그 세계의 창의를 즐길 독자도 있을 테다만.

세상만사에는 처음이 있다. 우정도 사랑도 처음엔 얼마나 온전한가. 그렇지만 처음이 있으면 끝도 있다. 그 때문에 어떤 관계도 아예 시작하지 않는 사람도 있다. 하지만 화자는 그 첫과 끝이 있기에 우리는 부둥켜안고 전율하고 눈물이 난단다. 이것이 마지막인 듯 사랑하라! 화자의 상대는 ‘다가갈수록 자초지종인 듯 너의 첫’을 준단다. ‘너의 첫 키스, 첫날밤, 첫 요리, 첫 꽃’, 그 ‘첫’의 신선함을 끝까지 잃지 않으려면 얼마만큼 긴장해야 하는 걸까. 씹을수록 감칠맛 나는 시다.

황인숙 시인
#첫과끝#김왕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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