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성하 전문기자의 그림엽서]아름다운 섬, 슬픈 추억… 프렌치 폴리네시아

  • 동아일보
  • 입력 2014년 3월 26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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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렌치 폴리네시아의 섬 보라보라의 엽서.
프렌치 폴리네시아의 섬 보라보라의 엽서.
이곳은 남태평양 한가운데 보라보라 섬입니다. 이름만큼 사랑스럽고, 엽서의 풍경 그대로 아름답습니다. 관광객이 찾아가 쉴 수 있는 섬 중 최고의 낙원이 아닐까 싶습니다. 여길 보통은 ‘타히티’라고 부르지요. 그런데 타히티는 나라 이름이 아닙니다. ‘프렌치 폴리네시아(French Polynesia)’가 정식 국명이지요. 이름에서 알 수 있듯 이 나라는 프랑스령입니다. 물론 국민은 원주민 폴리네시안이고요. 미국의 하와이 원주민, 뉴질랜드의 마오리족도 같은 폴리네시안입니다.

폴리네시안은 체격이 크고 강인하며 모험심이 강한 해양민족입니다. 그래서 지난 5000년간 끊임없이 바다의 섬을 개척하며 살아왔습니다. 동남아(말레이 반도)에서 남태평양으로, 다시 하와이와 뉴질랜드로…. 그것도 나무를 깎아 만든 카누를 타고 말이지요. 한 학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폴리네시안이야말로 지구상에서 가장 넓게 퍼져 사는 민족이라고. 보통 중국인이 더 그럴 거라 생각합니다. 지금의 분포만 보면 그럴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스스로 배를 만들고, 자발적으로 이동한 측면에선 폴리네시안이 단연 앞섭니다.

프렌치 폴리네시아는 작지 않습니다. 적도 아래에 있는 118개나 되는 섬이 다섯 개의 군도(아키펠러고)를 이루며 호주 뉴질랜드와 남미 대륙 사이의 남태평양 중앙을 차지하고 있습니다. 바다를 포함한 전체 면적이 유럽대륙에서 러시아를 뺀 것과 비슷할 정도로 넓습니다. 그중 가장 크고 주민이 많이 몰려 사는 섬이 타히티입니다. 이 나라가 타히티라고 불리게 된 연유입니다. 국민은 기껏해야 24만 명 정도입니다.

이렇게 아름다운 섬에도 슬픈 이야기가 전해옵니다. ‘우루’라고 불리던 빵나무(Bread fruit tree)에 얽힌 실화입니다. 빵나무 열매는 쪄서 가공하면 고구마와 감자 중간쯤의 맛을 내는데 이게 알려지자 영국 왕실이 쾌재를 부릅니다. 카리브 해 식민지 섬(자메이카)에 있는 플랜테이션(대규모 집단농장)의 흑인노예에게 식사 대용으로 제공하면 더 큰 이윤을 남길 수 있다고 생각한 때문입니다. 그래서 1787년 블라이 선장에게 바운티호를 내주며 이 나무를 캐오라고 합니다.

그런데 블라이 선장은 포악한 성격으로 선원의 반발을 삽니다. 결국 타히티에서 선상반란 끝에 쫓겨난 그는, 그를 추종하는 선원 몇 명과 함께 보트에 태워져 표류합니다. 그렇지만 뛰어난 항해술로 티모르 섬에 당도하고 마침내 귀환합니다. 그리고 다시 반란선원을 응징하기 위해 타히티로 항해해 임무를 완수합니다. 빵나무 열매는 나중에 노예에게 거부당해 쓸모없이 버려지지만요.

선상반란이 사형감이란 것을 아는 선원(9명)들은 다시 온 블라이 선장을 피해 외딴섬 핏케언으로 도피합니다. 그때 원주민(남자 6, 여자 11, 어린이 1명)을 납치해 데려가는데 반란 4년 만인 1791년의 일입니다. 이후 사건은 잊혀집니다. 그러다 1808년 다시 부각됩니다. 미국 포경선 토파츠호 덕분입니다. 선장은 지도에도 없는 핏케언 섬을 발견하고 거기서 존 애덤스라는 백인 남자를 봅니다. 그의 곁엔 몇 명의 원주민 여인과 아이들도 있었습니다.

17년간 섬에선 무슨 일이 있었을까요. 전말은 끔찍했습니다. 잘살 수 있을 거란 기대와 달리 섬은 아비규환의 지옥이었다고 합니다. 알코올의존증에 걸리고 풍토병이 만연했습니다. 살인까지 벌어졌습니다. 존 애덤스는 그걸 진정시켜 평화로 이끈 사람이라고 합니다. 한 선원의 도움을 받아 성경을 접하고, 개종을 하고, 선교를 통해….

호주의 시드니 동북방엔 노퍽이라는 작은 섬(호주령)이 있습니다. 12년 전 여기선 휴대전화 통신망 가설 여부를 묻는 주민투표가 있었는데 그 결과가 세상의 이목을 끌었습니다. ‘거부’됐기 때문입니다. 세계의 언론은 문명의 이기가 주는 편리함보다 자신들의 생활방식을 선택했다고 호평했습니다. 그러나 나는 살짝 의문이 들었습니다. 왜나고요. 2000여 명의 주민 대부분이 1856년 핏케언 섬에서 이주해온 바운티호 선상 반란자의 후손(194명)의 후손이라는 걸 알아서입니다. 통신망을 거부한 건 그리 자랑스럽지 못한 자신들의 뿌리가 휴대전화라는 문명의 이기를 통해 퍼져 나가거나 새삼 부각되는 걸 원치 않았기 때문은 아니었는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호주 자체가 유배지의 역사로 시작하는데, 내가 너무 과민한 걸까요.

조성하 전문기자 summer@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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